화요일, 11월 06, 2007

종이와 연필

[시인의 산문]

종이와 연필

내가 힘에 겨워할 때,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나는 연필과 종이와 씨름을 하며 그 힘겨운 시간들을 이겨내야 했다. 그리하여 난 지금도 이 종이와 연필을 소중히 생각한다. 내게 유일한 위로가 되어주었던 친구들. 그러나 이제사 생각해보니 이 종이와 연필은 나의 뜻과는 다르게 수많은 과거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기록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 기록들을 다시금 꼼꼼히 읽어보니 그 속에 그려져 있는 나는, 나를 혹독히 저주하여 더 이상 저주할 수조차 없는 하찮은 존재로 전락시켜버린 나였고, 그 속에 그려진 세상은, 증오와 욕설, 위선과 무기력함으로 가득 찬 세상이었다. 난 이 놀라운 기록의 집행자였던 종이와 연필을 쳐다본다. 종이와 연필은 책상 한 모퉁이에 어질러져 나의 뾰족한 시선을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다. 그들의 순진무구함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는 그래도 여전히 종이와 연필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나에게 속한 직공들. 저주받은 날 다시 위로하고 다시 저주할 테니, 그리하여 난 이 충실한 직공인 종이와 연필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이다.

저자 및 역자 소개

이철성
1970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했으며 동대학원 불문과를 수료했다. 1996년 『문학과사회』 봄호에 시를 발표하면서 시단에 데뷔했다. 시집으로 『식탁 위의 얼굴들』이 있다.

식탁 위의 얼굴들 (이철성 시집)

1998년06월17일
신 4X6 판, 145 쪽
ISBN : 89-320-1009-9 02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