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4월 03, 2016

동묘 벼룩시장

가끔씩 동묘 벼룩시장을 찾는다. 번잡함 속으로 들어가 색다른 시간을 즐기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효용을 다한 도구들이 새롭게 주인을 만나고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진귀한 광경을 체험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동묘공원 정문앞에 자리잡은 어떤 아저씨의 낙천적인 모습이 인상깊에 기억에 남았었다. 당당한 자신감이랄까? 그런 모습에서 오는 여유와 해학으로 손님을 대하는 모습이 좋았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어디 잘차려진 매장을 다니면서 이런 느낌의 판매자를 만난 기억이 있었던가? 


동묘에 자리잡기전에는 황학동 일대가 벼룩시장의 중심 이었다. 그곳이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 되면서 여기 일대로 왔다.


가끔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물건들도 있다. 전투기의 캐노피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79년에 지어졌다는 숭인 상가아파는 그동안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이 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겹겹이 쌓인 시간이 주는 아련한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해학적인 모습으로 발길을 잠시 멈추었던 사자상(?) 이다. 중국에서 만들어 진듯한 느낌인데 어느 곳에 두어도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릴거 같다.


우연이 만들어낸 이런 풍경을 만나는게 좋다.


효용이 다해 버려졌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물건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삶의 뭉쿨한 단면을 느끼기도 한다. 몇시간의 즐거운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을 탔지만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 이곳으로 회귀하게 될거 같다. 그리고 즐거운 구경을 이어갈거 같다.


화요일, 3월 22, 2016

안양 나들이

안양시내를 걸었었다. 광고판과 배달오토바이의 원색이 맑았던 그날의 햇살을 더 돋보이게 했다. 처음 왔을때의 낯설음도 거의 없어졌고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삼청동 골목만큼이나 친숙해졌다. 걷다가 쉬면서 시원한 맥주한잔 마실 곳은 아직 없지만 곧 찾게 되지 않을까. 


사물의 질감을 더 돋보이게도 한다.








화요일, 1월 12, 2016

서촌에서 만난 고택

서촌을 들를때 마다 눈에 띄는 고택이 있다. 지금은 서민들이 살고 있는 가정집이지만 한때 대단한 위세를 가졌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집일까 궁금했었는데 뜻밖으로 일제시대의 매국노 윤덕영의 집이었다.  이 일대에 벽수산장이라는 초호화 건물과 14채의 한옥이 있었고 계단위의 한옥은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아래 글은 뽐뿌게시판( http://goo.gl/5PiUBL )에서 발췌한 글

1873(고종 10)∼1940.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파. 본관은 해평(海平). 영돈녕부사 철구(徹求)의 아들이며, 택영(澤榮)의 형으로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삼촌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비서감우비서랑(秘書監右秘書郎)이 되었다. 비서랑의 자격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오고, 1896년 내각총리대신비서관 겸 내각참서관·경연원시독관(經筵院侍讀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만장서사관(輓章書寫官)에 임명되었다.

1897년 중추원3등의관에 이어 바로 2등의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농상공부협판참서관에 임명되었다. 1899년에는 내부지방국장, 1901년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궁내부특진관을 겸임하였다. 이해에 황해도관찰사로 전임하였고, 일본이 1898년 경부선철도부설권을 획득한 지 3년 뒤인 1902년 착공을 시작하자 철도원부총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지계아문부총재(地契衙門副總裁)에, 1904년에는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비서원경(秘書院卿)·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의정부참찬·홍문관학사·평리원재판장·의정부찬정을 역임하였다. 1905년 교육사업에 관계하여 법학교를 설치한 바도 있다.

1908년 시종원경(侍從院卿)이 되고, 1910년 국권상실 때에 궁내부대신인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합방불가피 역설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받고 주저하다가 데라우치(寺內正毅)의 협박·회유에 동의하여 그 조인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국권상실 후 황실과 황족에 대한 대우와 친일분자에 대한 행상(行賞)을 실시하였을 때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