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9월 29, 2007

야근에 대한 기억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회사( 지금은 없어졌다 )에서의 일이었다. IT SI업체였고 부사장격인 사람이 신입사원까지 관리하는 수준의 조직관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취직을 위한 지렛대로 IT학원을 다녔었다. 수료 후 그 학원의 중개로 들어간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없었다. 과,차장급 중간관리자는 한명도 없었다. 부사장격인 이사라는 사람이 말단직원까지 모두 체크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추진하는 일들도 그 이사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스케줄과 사람에 대한 평가로 이뤄지고 있었다. 시스템과 체계라는걸 기대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이뤄지는 일들앞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생존법칙은 알아서 배우는거였고 알아서 일을 찾아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었고 유망한 사람이었다.

현실파악능력이 뛰어나지 못했던 나는 한참을 헤매야 했었다. 나는 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을까, 왜, 내가 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들을 가슴속에만 품고 지내야 했다.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일이 있으면 무작정 밤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툭하면 주말에도 일하는 곳에 나와 있었다. 최소한 그렇게는 해야 된다고 여겼었다. 한번씩 있는 회식자리에서 야근과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누구나 그렇게 한다'라는 말을 어김없이 듣곤 했기에.

한참이 지난 후 그때의 일들이 회사의 횡포였고 무책임한 직원관리에서 비롯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과 버릇들이 여전히 내게 남아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퇴근시간이 지난 후 일어서는 것이 왠지 불안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공감이 가는 기사를 읽었다.

프레시안 기사 - '순진하면 사회생활 못 한다'는 사회가 정상인가

토요일, 9월 08, 2007

죽음과 함께 춤을

이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계기는 목차에 들어있는 "천국에서 그가 본 것들"이라는 소제목 때문이었다. 죽음이 주는 허망함을 사후세계라는 것에서 그나마 위로를 받아 왔던 나는 현직의사의 입장에서 시후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무척 관심이 끌렸다. 서점에 갔을때 내가 생각하던 책이 맞을까 확인을 하려 했는데 재고가 없었다. 좀처럼 이용하지 않는 인터넷을 통해 책을 샀다.

좀 실망을 했다( 내가 바라던 내용이 아니었음 ). 저자는 현직 의사의 자격을 가진이로써 철저히 과학의 입장에서 환자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안락사 시킨 환자의 마지막 모습에서 신비한 느낌을 잠시 언급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이 사람은 임사체험과 사후세계와 같은 비과학적인 영역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의사의 능력을 필요이상으로 높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재치있게 이해시켜 준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삶에 대한 미련과 의사에게 의존하는 모습들을 익살스럽게 표현을 한다. 그런 환상을 심어준 의사들의 한계와 오만을 비판한다.

현대의 의학이 자리잡은 시점을 19세기말 정도로 볼때 눈부시게 발전한 부분은 "병리학, 세균학, 마취학" 이렇게 딱 세부분이라고 말한다. 그 이외의 눈부시게 발전해 보이는 부분들은 각종 편의장치들이 잔뜩 추가되었지만 본질적으로 변한게 없는 100년전의 자동차와 현대의 자동차의 차이를 비유해가며 이해시킨다.

잊을만 하면 심심치 않게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심지어는 암치료 성공율이 50%정도라고 선전 하면서 발전된 의학의 성과를 광고 하지만 이런 뉴스들은 1950년대에 발표되었어도 비슷한 성공율도 발표되었을 것이라면서 과장된 현대 의학수준의 현실을 설명한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행해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환자 본인과 가족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게 된다. 자연스럽게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가능하게 될지는 의문이다. 존엄한 죽음의 문제를 벗어나 치료비 부담의 문제로 안락사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숱하게 생기게 될지 모른다.

병원비의 문제가 아닌 존엄한 삶의 마감의 문제로써 안락사를 고민하고 시행할 수 있는 네델란드의 환경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한번도 떨어진적이 없으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맞이하기도 힘든 문제이다. 그러기에는 현세에서 맺고 있는것들이 너무나 많다. 모든것들을 포기한다고 치더라도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문제 앞에서 죽음을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내세라도 있으면 거기에서 다시 만난다는 위안이라도 가질 수 있으면..


금요일, 9월 07, 2007

지적 독립

상대의 권위를 너무 쉽게 인정하고 따라가려고 하던 때가 있었다. 벗어난거 같지는 않고 내가 그렇다는걸 느끼게 된지가 얼마 되지 않은거 같다. 가깝게는 주변의 사람들 부터 책을 통해 알게된 사람들의 면면까지 귀감이 될만한 사항들을 하나라도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사람은 멋있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고 본받아야 할 사람이 되었다.

졸업 후 한참동안 창작과 비평을 계속 정기구독을 했던 이유도 거기에 나오는 내용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실의 이야기들고 내가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동안 이보다 더 완벽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까지 가졌던 어느 시사평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그 사람과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음을 느끼게 되었을때 스스로를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대학다닐때 학생회의 주장들을 가슴한켠으로 드는 의구심들을 애써 묻고 자발적인 의식화(?)의 길을 걸어갔던 것과 같이.

"지적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글을 하나 읽었다. 최근들어 내게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와 이유를 명쾌하게 이해시켜 주었다.

"...지적 도덕적 권위에 주눅들어 최소한의 합리적 의심마저 내던지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런 식의 독서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깨달은 건 서른이 다 돼서였다. 어떤 공인된 전문가도, 어떤 공인된 대가(大家)도 틀릴 수 있다. 술에 취해 한 말이라 그럴 수도 있고, 격정이나 편견이나 이해관계에 휘둘려 쓴 글이라 그럴 수도 있고, 그가 본디부터 이름에 미치지 못하는 헐렁이여서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지적 독립의 첫걸음이다...."

말의 힘 - 고종석

일요일, 9월 02, 2007

가을 문턱에 돋아난 새싹들.

조그만 텃밭을 일구고 있다. 지난주에 뿌렸던 무우씨와 배추 모종이 싹을 돋기 시작했다. 배추모종을 처음 받고서 심었을때 너무 연약해 보여 이중에서 몇개나 자리를 잡게 될까 걱정했었는데 오늘 보니 모두 자리를 잡아 파릇파릇하게 올라오고 있었다.
뿌렸던 무우씨들은 그물망을 덮어두었었지만 비둘기등 날짐승들은 그물망을 헤짚고 주변의 씨았을 파먹었다. 그런 무우씨들도 이제 싹을 돋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텃밭 농사를 먼저 했던 사람들이 배추는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배추를 키우기 위해 화학 농약을 뿌리기 싫던 차에 유기농 농약이 있음을 알았고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예쁘게 자리를 잡은 배추와 무우가 잘자라 기쁨을 수확할 수 있으면 좋겠다. 텃밭농사는 노동의 의미와 우주원리를 체득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밭에 사마귀 한마리가 있었다. 둘째 윤성이가 호기심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린 아이들에게 곤충들이 사람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임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교육의 기회도 된다.
박각시 한마리가 주변밭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밤에 주로 활동하는 나방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놈은 해가 없어서인지 연신 빨대처럼 길다란 대롱을 꽃에다 꽂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