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0월 23, 2007

자유

영화 "아이로봇"의 끝부분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NS-5 로봇 ‘써니’가 스프너에게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하지요"라면서 자신의 불안한 미래에 대해 묻는다. 그러자 스너프는 "힘들어도 니가 알아서 해나가야해. 그게 바로 자유라고 하는거야."라고 대답을 한다.

자유의 의미를 느끼게 해준 명대사였다.

화요일, 10월 16, 2007

실망

좋아하던 지식인이 있었다. 그중 몇명은 실망감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의 북한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현실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손한 태도를 거침없이 비판하던 이가 대상이 북한이 되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돌변하는 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이의 도움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출입국 심사를 받는 자리에서 앞에선 이가 북한의 관리로 부터 호된(?) 질책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집을 두채를 가지고 있었고 세금 절감의 목적으로 부부이면서 호적을 별도로 가지고 있은 모양이었다. 그 북한 관리는 이 부분을 문제 삼아 '아주 돈이 많은 모양이구만요' 라는 말을 하면서 여권을 팽개쳤다고 한다. 그 장면을 본 그 평론가는 북한관리의 불손한 태도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단지 돈이 많은 것이 불편한 세상에서 겪어야 할 당연한 일로서만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고서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나온 북한인들의 단결성을 칭찬하는 이야기로 이어졌었다. 평소에 보여주던 그의 모습에 비춰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로써 끝을 흐렸다.

이번 남북정상회담때 도올 김용옥씨도 같이 방문했었다. 5만명이 동원된다는 아리랑 공연에 대한 감상을 쓴 기사를 읽었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정도로 웅장한 스케일로 벌어지는 공연앞에서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는건 쉽지 않은 일일거 같다. 하지만 감상과 이성적인 판단은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인으로 생각했고 그런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감상은 어떤것일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기대 이하의 반응을 보고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플라톤의 국가론까지 들먹이며 북한체제를 찬양을 하는데 대해서는 실소를 머금어야 했다. 학교 단위의 운동회를 위해서도 교사들의 폭행을 당하면서 준비를 한 기억들이 드문건 아닐 것이다. 5만명이 동원되어 벌어지는 행사가 체제를 찬양하게까지 하는 의미를 가진데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

홍수에 떠내려 가는 다섯살짜리 딸을 구하는것 대신 김정일의 초상을 먼저 구해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그렇게 대단한 집단일 수 있을까. 그런 체제를 선전하는 행사가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말한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폴리테이아'인데, 그것은 스파르타를 모델 중의 하나로 삼은, 최고선(The Supreme Good)을 구현하기 위하여 엄격히 통제된 정체(政體)를 말한다. 인간의 출생부터 우생학적 고려를 거쳐 집체적으로 교육되는데,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실은 사유재산의 부정을 위해 가족까지도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상국가에는 '엄마' '아버지'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북한 사회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비하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영국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가 처음 쓴 말인데 그것은 우(ou)라는 부정사와 토포스(topos)가 합쳐진 희랍어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북한은 사실 이 지구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기 어려운 정체를 가진 나라임에 틀림없다. 아리랑에 출연하는 5만여 명의 동작이 변검(變)의 탈처럼 순식간에 변하여 일초일촌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거대한 경기장을 안방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교예사들의 아슬아슬 곡예는 간담을 서늘케 하지만 그 절제 있는 동작의 미학은 찬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쇼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 유토피아의 삶이며 역사며 가치이며 희망이다. 이러한 집체적 훈련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교육을 받고 의식화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과목은 용맹스러운 음악과 집체적인 체조였다.

"보지 않으면 몰라. 좌우지간 보고 말해야겠구먼." 민노당 천영세 의원의 소감이다. 해석은 자유다. 남한 사람들의 해석을 북한 사람들이 강요할 수는 없다. 단지 우선 보아야 하고, 우선 정확히 그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왔다. 성과의 조목도 매우 구체적이다. 전일한 목적을 위해 집체적으로 통합된 사회! 과연 그 최고선의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불변의 고정적 목적일 수는 없다.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기대는 이러하다. 집체적으로 통합된 에너지를 과연 그들은 '경제강국'이라는 목표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단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은 물질적으로 잘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안내한 조평통의 여성 동지가 말한다 : "잘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목표입네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탐욕이 배제된 지성(nous)이 실현되는 나라였다. <도올 김용옥 기자: http://news.joins.com/>

NLL

2007년 남북정상회담이후 NLL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다. 정상회담 직전부터 NLL이야기가 솔솔 흘러나올때 부터 재설정 문제의 공식화는 분명해 보였다.

사실 유엔 해양법 등 국제 규약에 따르면 NLL에 대한 남쪽 주장이 성립되기 어렵다고 한다. 이같은 재설정 문제의 합리성에 대한 이야기들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으나 왠지 석연치 않은 느낌이 함께 들었다. 좀더 솔직이 말하자면 재설정문제에 찬성하는 입장이 아니면 수구꼴통세력으로 몰아붙이는 반응들에 불편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헌법의 적합성을 떠나 남북이 현실적으로 독립적 국가로 기능한다고 볼 때 NLL은‘경계선’의 의미로 작용해왔다. ‘헌법’과 ‘정치적 현실’의 구도에서 보면, NLL은 후자의 측면에서 존재 의미가 있을 것이다. 수복해야할 괴뢰정권인 북한과의 남북정상회담이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 측면이라는 이야기다. 반대로 미제 앞잡이들의 괴뢰도당인 남한정부의 괴수에게 의장대 사열까지 벌였던 북한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 일것이다.

북한도 이제껏 그네들이 지켜왔고 사실상 인정해 왔던 경계선으로서의 NLL을 새삼 문제 삼고 나오는 이유가 궁금해졌다.

서해 북방한계선(NLL)이 국제법적으로 영해를 규정하는 경계선이 아니라는 견해도 있으나 사실상 북한 당국도 받아들인 현실적 경계선이었다. NLL은 1953년 정전협정 서명 직후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설정했다.

정전협정에선 전쟁 전 남북 경계선에 근거해 서해의 섬들에 대한 관할권을 나눴다(제2조 13항). 당시 유엔군은 북한의 군수물자가 집중돼 있던 서해 연안에서 압도적 제해권을 갖고 있었으나 협정 체결을 위해 양보한 것이다.

유 엔군은 북위 38도선 북쪽 지역의 섬에서 철수했다. 바다를 봉쇄한 상태에선 휴전이 성립되기 어렵기 때문이었다. 클라크 사령관은 38도선 아래의 일부 섬까지 북한에 내줬다. 문제는 해상 경계선 설정에 합의하지 못해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발적 충돌을 우려한 클라크 사령관이 NLL을 일방적으로 선포한 것이다.

북한은 53년 이후 20년 동안 NLL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준수했다. 63년엔 북한 간첩선 문제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에서 북한 대표가 "우리 배는 NLL을 넘어간 적이 없다"고 말했을 정도다. 실질적으로 관할권을 받아들인 것이다. 73년 들어 북한은 백령도.연평도 인근 NLL을 43차례 넘나드는 등 NLL을 분쟁수역화하려 했다. 그럼에도 북한은 84년 수해물자를 싣고 오가는 선박의 통행 기준선을 논의할 땐 NLL을 해상 경계선으로 인정했다.

92년 남북기본합의서 제11조에선 "남북 불가침 경계선은 정전협정 이후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 온 구역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93년 국제민간항공기구(ICAO)가 NLL을 기준으로 한국의 비행정보구역을 수정했을 때도 북한은 토를 달지 않았다.



NLL은 시작이야 어찌되었건 50년이상 실질적인 경계선 역할을 해왔다. 남북한의 경계선을 보더라도 합리적으로 선이 그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후에 북한이 문제를 제기 하면서 말하는 경계선의 개념이 얼마나 억지스러운가는 위의 사진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목요일, 10월 11, 2007

유치원 가을행사

진성이 유치원에서 가족들이 참여하는 행사를 가졌다. 가까운 불곡산의 중턱까지 갔다오면서 중간중간 준비해둔 이벤트를 진행하는 형식이었다.


혹시라도 비가오지 않을까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행사가 끝난후부터 빗방울이 날리기 시작했다. 씩씩하게 산을 타는 진성이가 커서도 산의 묘미를 알게되어 그의 영혼에 쉼터같은 존재로 자리잡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았다.


행사 마지막에 종이찰흙으로 목걸이를 만드는 이벤트가 준비되어 있었다. 왼쪽부터 진성엄마, 나, 진성이가 만든 결과물.

웃으라는 주문에 적극적으로 반응해주는 진성이.

주변의 사람들과 또는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알고 창조적인 힘을 가질 수 있도록 키우고 싶다. 어떻게 하는건지는 아직 잘 모른다.

아파트촌의 석양

외출후 집에 들어설때 였다. 그리 맑지 않은 날이었는데 지는해의 모습이 참 예뻐 카메라에 담았다.

어릴적에 살던 집에서 보면 산비탈에 있던 학교 건물 옆으로 해가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지는 해의 집이 그 산비탈 넘어 어느곳에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 산비탈에 사는 사람들은 저녁해를 직접 만져볼 수 있는것으로 알고 부러워 했다. 이제 그 집에 다시 갈일이 없어졌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지만 친근하고 따뜻하게 느껴졌던 저녁해의 느낌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을거 같다.

토요일, 10월 06, 2007

존재미학

예전에 읽었던 책을 책꽂이에서 한권 뽑았다. 재생지를 사용했기에 묵은 종이냄새가 알싸하게 다가왔다. 그중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일주일넘게 가방속에 있으면서 출퇴근때마다 몇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이책을 샀을때가 2001년도 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옥죄어 오던 주변의 상황과 힘에 무지하고 무력하게 밀려가고 있었고 출구를 찾아 무던히도 헤매고 있었다.
연필로 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내용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걸 보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내면의 준비가 덜되었던거 같다. 어쩌면 그때 운명의 힘이 그런 비루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줄 실마리를 던져주었던 건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지금의 내 삶에도 창조적인 힘을 발휘할 여지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 비루한 일상에서 출구를 찾고 나서는 용기와 행동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새롭게 읽게되는 기쁨이 있다니 좋은 책과 글을 읽는것의 즐거움이 이런것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사가게 되면 근사한 책꽂이를 가져야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거 같다.

주체는 권력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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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일방적인 강제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주체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움직인다. 다시 말해 푸코적 의미에서 권력이란 주체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주체를 무력화 시키는 힘이다. 거시권력은 바로 이 미시권력의 망을 토대로 비로소 작동을 하기에, 거시권력을 무너뜨리는 것만으로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푸코로 하여금 미시권력에 대한 분석에 착수하게 만든 동기였을 게다. 사실 군사독재가 물러간지 1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도 우리 사회 전체가 국방색을 띠고 있는 것은 거시권력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던 그 미시권력의 망이 얼마나 집요하고 완강한지 잘 보여준다.

사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이처럼 촘촘한 인간관계의 망으로 둘러 쌓여 있고, 이 속에서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 주체가 하는 말, 한 주체가 하는 행동, 아니 한 주체의 정체성 자체가 바로 이 '관계'라는 이름의 권력효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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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배려

프랑스어로 '주체'(=subject)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뜻과 아울러 그 정반대, 즉 '충실한 신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종종 간과되곤 하는데 푸코가 근대적 주체의 형성과정을 동시에 권력의 신민화 과정으로 파악하는 바탕에는 암암리에 이런 언어놀이가 깔려 있다. 초기의 푸코는 다분히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주체를 권력의 효과로, 주체의 발언을 담론의 효과로 파악했다. 말하자면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근대시민의 이상, 즉 '자율적 주체'란 한마디로 환상이라는 얘기다. 자율적 주체란 실은 외부의 감시의 눈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놓은 사람, 즉 타인의 감시가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 한마디로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주체'란 그야말로 권력의 망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벌레들과 다르지 않다. 그 벌레들은 머리로는 자기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사나 그의 행동만은 거미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유물론적인 권력 분석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망에 걸린 벌레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실은 죽음의 망에 걸린 구속된 존재(=타율적 대상)라는 쓰디쓴 진리를 깨닫고, 일체의 쓸데없는 저항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게다. 바로 이것이 9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푸코를 수용한 방식이었다. 이 경우 푸코는 앞서 내게 자기의 "인생공부"를 충고한 네티즌처럼 우리에게 일체의 저항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실천적 보수주의자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의 "왜소한" "인생"을 남에게 권고하는 것이 푸코가 권력분석을 한 동기는 분명히 아니었으리라.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에서부터 푸코는 문제의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권력의 망이라는 구조로부터 주체를 객관화하여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주체의 관점에 서서 권력의 망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방안을 찾는 방향으로 선회를 한 것이다. 즉 냉철한 권력분석의 과학에서 권력의 자기장 속의 인간이 자기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윤리학으로 문제의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 새로운 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권력의 망은 더 이상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고 결정하고 형성하는 힘이 아니라 동시에 나에 의해 변화될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내가 권력의 망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전략으로써 푸코가 제시하는 것이 '자기의 배려'라는 존재미학이다. 존재미학은 주체를 한갓 사물로 대상화하는 권력의 힘에 맞서 자기를 다시 주체로 형성할 미적인 윤리학이다. 다시 말해 권력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자기를 포기하지 말고 자기를 배려하고, 이로써 자기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실천적 테크닉의 체계가 필요하며, 이것이 이 사회의 새로운 미적 에토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권력이 강고하다 하더라도 그 권력의 망 속에서 미리부터 자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망가질 필요는 없다. 다른 삶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 앞에서 미리 망가지는 것이 삶의 지혜로 통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덕은 반공도덕이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윤리는 국민윤리다. 우리에게는 자기의 삶을 배려하는 개인윤리가 없었다. 파시스트적으로 구조화된 사회는 굳이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 속에서 자란 우리는 그것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 속에서 나를 잊으라고 요구하는 국민윤리나 반공도덕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료시민들과 평등하게 소통을 하는 테크닉으로서의 시민윤리이다. 이때 푸코가 말한 존재미학은 권력의 망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비루한 존재들에게 권력의 망 속에서 저항과 자기의 배려를 위한 실천적 테크닉을 언어적으로 분절화한 새로운 윤리, 성숙한 시민 사회를 위한 미적 에토스가 될 수 있다.

권력욕과 권력의지

니이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푸코에게도 '권력'이란 낱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선악의 기준을 대기 이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세상은 권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또 권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들 주의 어떤 것은 정당하며, 어떤 것은 부당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권력이고 대항권력도 역시 권력이므로 일체의 권력을 행사하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처녀성의 도덕은 니이체나 푸코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90년대의 푸코 수용은 다분히 저항권력 자체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뻔뻔한 보수적 논리로 귀결된 감이 있다. 푸코의 주장은 권력으로부터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거 권력의 노예가 되지 말고 그것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실천적 테크닉을 찾으라는 것이다.

니이체가 말한 '권력의지'는 흔히 말하는 '권력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권력의지'란 본디 한 인간이 가진 창조적인 힘(puissanc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력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을 해나가는 추진력일 수도 있고, 그 밖에 한 개인이 갖고 태어난 이론적, 실천적 능력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힘'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굳이 '권력욕'이라는 것을 가질 필요가 없다. 거기엔 아예 관심이 없다. 외려 무능한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을 확인받고 싶을 때 흔히 말하는 '권력욕'에 목을 매고, 남들에게 자신의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법이다. 그것이 자기가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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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자들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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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에는 거창한 대의가 있었고 위대한 영웅이 있었으며, 그들의 무용을 찬양하는 서사시가 있었다. 하지만 미시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은 우리처럼 비루한 존재들이 치러야 하는 재미없고 지루한 산문적 성격의 전투다. 거시권력에 대한 싸움의 주체가 화려한 중세의 기사라면 사회의 모든 곳에 깔려 있는 미시권력에 대한 싸움의 주체는 이름 없는 산업사회의 보병들이다. 흔히 푸코의 존재미학에 가해지는 비판 중의 하나는 '댄디라는 이름의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윤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사실 미시권력에 대항하는 미시정치학의 주체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이름 없는 보병들이다. 이들 역시 자기의 존재미학을 가질 자격이 있다. 자기의 몸을 촘촘히 감싸고 있는 권력의 망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 관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가운데 자기를 배려하는 실천적 테크닉. 이를 통해 제 존재를 완성으로 이끄는 실천의 미학은 무엇보다도 우리처럼 비루한 자들을 위한 미적 에토스다.

자기를 소외시키는 반공도덕이나 국민윤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배력하기 위한 시민적 에토스를 형성해야 한다. 진정한 엘리트는 그 잘난 1류 대학을 나와 기껏 자신을 포기하고 제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소위 '엘리트'들의 천민적 행태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사회의 모든 곳에서 자기 둘레릐 권력의 망, 즉 자기를 둘러싼 관계들을 변화시켜 사회를 항상 새롭고 젊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미시정치학을 통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제 삶을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들, 자기를 배려하는 존재미학을 가진 이 비루한 현대판 폴리스의 인간들이야말로 현대의 귀족이며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가 되는 길은 우리처럼 비루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아웃사이더_04 / 진중권, "존재미학, 비루한 자들의 미적 에토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