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월 12, 2008

Surefire L2


늦겨울에 산행을 간적이 있었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은 산이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일행을 놓치게 되었었다. 그때 지도등 내 위치를 알 수 있는 수단도 없었고 휴대폰도 터지지 않았다. 날은 어두워지고 있어 배낭속에서 헤드랜턴을 꺼내었다. 스위치를 켜니 불빛이 들어오나 싶더니 곧 꺼져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헤드랜턴에 부착되어 있던 예비전구로 갈아 끼워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앞이 캄캄해 지는 느낌이었다.

다행히 능선 아래도 보이는 마을의 가로등 불빛이 멀리 있지 않아 용기를 내어서 계곡을 타고 내려오기 시작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건 낙엽이 모우 떨어진 맑은 겨울하늘에 초승달과 별빛이 있어 희미하게 나마 족적을 찾으며 내려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을 근처의 도로를 만나기 까지 두어시간의 하산은 이제껏 경험했던 산행중 가장 어렵고 두려운 경험이었다. 이후로 플라스틱 몸체로 만들어진 물건들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온 후 후레쉬를 찾기 시작했다. P사의 제품이면 세계최고의 제품인줄로만 알았던 나였다. 후레쉬에는 아무런 안목도 없었었다. 금속몸체로 만들어진 제품은 뭔가 제대로 된 물건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있었다. 플라스틱 제품보다 단단하고 품질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국산 A사의 후레쉬를 먼저 구입했다. 알루미늄 몸체에 한참 유행하는 LED(Luxeon)를 사용했는데 전구 수명이 100,000시간이라는 말에 나의 이성은 마비 되다시피 주문을 했다. 그러나 곧 실망하고 말았다. 연속사용시간은 마지막으로 불이 꺼지는 시간에 다름아니었고 몸체도 알루미늄이지만 몇번 떨어뜨리면 망가지거나 불이 들어오지 않을거 처럼 부실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빛이 나오는 렌즈 부분은 결정적인 불신감을 가지게 했다.

하나를 사도 제대로 된 제품을 사야 된다는 장비선택의 원칙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게 되었다. 일단 먼저 사용해 본사람들의 사용기를 몽땅 찾아서 보기로 했다. 후레쉬도 수입제품이 있다는걸 알게 되었고 Inova, Arc라는 말이 익숙해 질만큼 안목을 길러갔다. 급기야 Candlepowerforum까지 넘나들면서 후레쉬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과 제품에 대한 이야기들을 알 수 있었다. 그때쯤 후레쉬 가격이 10만원이 넘어 설 수도 있다는 '당황스러웠던' 사실은 이제 상식이 되었었다.

마음에 드는 후레쉬를 찾기 위한 여정이 그렇게 이어지던중 Surefire라는 낯선 이름의 후레쉬를 알게 되었다. 영화속의 총기들에 장착되는 후레쉬를 이 회사의 제품이 많다는 것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었다. 전까지는 그게 맥라이트인줄 알았었다. Surefire의 높은 가격은 왠만한 제품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만큼 높아진 눈높이와 예전의 산행 경험에서 얻은 기억때문에 충분히 극복이 되고 있었다. ARC, INOVA, Surefire에서 끝까지 저울질을 하던 나는 결국 Surefire의 Military Spec.이라는 말에 이끌려 Surefire로 방향을 정했다.

그러나 Surefire에서도 또 한차례 혼돈을 겪어야 했다. 맨처음 L4가 눈에 들어왔었다. 평가를 봐도 그렇고 한눈에 들어왔던 외모를 봐도 L4쪽으로 관심은 기울더니 곧이어 L1과 L2도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냥 세개를 다 가져야 겠다는 생각도 했었지만 그럴 형편도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기준을 정하고 다시한번 냉정하게 판단을 하기로 했다.

첫째, LED이어야 한다.

기존의 후레쉬(헤드랜턴 포함)들을 사용할때면 오래 켜두면 내심 불안했었다. 전구라는 것이 분명히 수명은 있는 것이고 사용목적을 생각할때 교환해야할 상황이라는게 꼭 교환하기 편한 장소에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겨울, 비가 오는등의 상황이라면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예비전구를 항상 휴대할 필요가 없다는건 신이 선물한 후레쉬로 생각되어졌다. - L1, L2, L4로 좁혀짐 -

둘째, 튼튼해야 한다.

후레쉬의 경우에 빛의 밝기는 둘째로 치더라도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히 켜진다는 보장이 되어야 했다। 불빛이 필요하다는게 편안한 상황일리가 없다. LED기술의 발전으로 밝기면에서는 Surefire를 넘어서는 제품들도 있어 보이는데 내구성에 대한 신뢰성 만큼은 넘어서는 제품을 아직 보지 못했다. Surefire사의 부사장 폴김씨가 한국을 방문했을때 행해졌던 L4 박살내기(?) 퍼포먼스는 나의 L2를 이야기 할때마다 자랑거리로 삼는 소재이다. 시험환경에서는 잘 되다가도 막상 현장에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튼튼함을 떠나 폴김씨가 가진 자사 제품에 대한 자신감에 더 놀랬던거 같다. 언제어디서든 확실한 빛을 얻었다는것 만으로도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 L1, L2, L4 모두 만족 -


셋째, 지속시간이 우수해야 한다.

야간산행등을 위해 최소한 6시간 이상 꾸준한 불빛을 낼 수 있어야 했다। 야영을 할때는 잠들기전까지 4시간 이상 밝기가 지속되어야 하고 새벽에 깰일이 있어도 건전지 교환 없이 필요한 불빛을 낼 수 있어야 했다. 만약 그때 U2가 나왔더라면 고민의 깊이는 한층더 심했었거나 아예 없었을 수도 있었을거 같다. L1, L2의 특징이 부각되는 순간 이었다. 특히 FlashLightreviews.com에서 봤던 L2의 지속시간 그래프는 황홀함 자체였다. - L4 탈락 -


넷째, 확실히 밝은 빛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사실 밤을 낮으로 바꿀 목적이 아니라면 15루멘 정도의 빛이면 대부분의 경우 충분하다. 주로 산속에서 사용을 염두에 두었기에 숲속에서 너무 밝은 빛은 오히려 '빛공해'가 될 수 있다는걸 안다. 그러나 가끔씩은 아주 밝은 빛을 필요로 할때도 있다. 야간산행의 경우 갈림길 이라던지 족적이 희미한 곳 또는 앞에서 뭔가 바스락 거리는 소리라도 들리는 때면 잠깐 이라도 환희 비춰줄 수 있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된다. L2가 가진 100루멘의 빛이 부각되었다. - L1 탈락 -

위의 세가지 기준을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나의 선택은 L2로 낙점을 봤다. 그렇다고 L1과 L4가 문제가 있거나 성능이 못한다는건 아니다. 다만 사용목적이 나와 맞지 않았을 뿐이다.

L2를 장만한 이후로 큰부피를 차지하던 개스랜턴과 개스를 더이상 가지고 다니지 않게 되었다. 텐트 근처의 나뭇가지에 묶어두면 잠들기 전까지 그 특유의 Flood한 불빛이 충분히 주변을 밝혀 주기 때문이다. 비교도 되지 않는 크기와 무게에 더큰 기능을 해주고 있다.

케이블 방송중 디스커버리 채널의 사람 대 야생( Man Vs. Wild )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주인공 bear grylls는 조난을 가상한 상황에 뛰어들때 항상 휴대하는 두가지 도구로 부싯돌(Swedish FireSteel Fire Starter)과 칼한자루를 휴대한다. 나는 여기에 Surefire를 휴대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매번 가져 보았다. 밤이 되면 칼과 부싯돌을 이용해 나무를 자르고 불을 지펴 보금자리를 만들지만 어둠속에서 확실하게 빛을 낼 수 있는 든든한 후레쉬가 있으면 또 얼마나 큰 위안과 도움이 될까 하는 생각을 가졌었다.

L2가 항상 나와 함께 한지도 5년이 되었다. 그동안 많은 후레쉬가 나왔고 비슷한 외모에 더 밝은 빛을 내는 제품들도 많지만 Surefire에 익숙해진 내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한다. 사물도 사람과의 인연이 있다. 내게 맞는 장비를 찾고 만나는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기 때문이다. Surefire의 의미를 찾아보니 "확실한, (성공이)틀림없는" 이라는 뜻으로 조회가 된다. ( 이 말을 일부러 회사명으로 삼았는지는 모르지만 )사전의 의미 그대로 언제 어디서나 확실한 빛을 내줄 수 있는 나의 Surefire L2와 만난건 큰 기쁨이었다. 각별하게 선택했고 각별하게 내곁에 있는 소중한 나의 빛은 언제까지나 함께 할 것이다.( 사실 요즘 2007년형 L1이 눈에 차이고 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