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월 03, 2008

풍요

살고있는 아파트의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때마다 폐지를 모아두는 곳을 유심히 살펴본다. 가끔씩 볼만한 책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몇일전에는 한글자도 쓰여지지 않은 새노트 한권을 발견했었다. 두꺼운 표지에 속지와 표지를 나누는 종이에 페이지를 나누는 끈도 달려 있는걸로 봐서 가볍게 사용할 용도로 사지는 않았을거 같은 좋은 품질의 노트였다.

신학년이 다가오는 2월말이면 시내의 대형문구 앞에 잔뜩쌓아놓은 공책 더미들에서 과목별로 10여권의 노트를 샀었다. 공책을 사는건 흔하지 않은 일년만에 찾아오는 설레이는 행사였다. 이후 우리나라는 계속된 성장으로 주변의 일상들이 서구 도시의 여느곳과 별로 다를것이 없을 정도로 변해갔다. 카트를 밀고 다니며 물건을 담는 대형할인매장의 광경은 영화속에서 풍요로운 세계의 상징들이었지만 어느새 우리주변의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다. 장을 본다는 말은 마트에서 쇼핑을 한다는 말로 바뀌었다.

이제 어디든 물건이 넘치는 세상이 되었다. 쇼핑을 하는건 무거운걸 들 수 있는 이의 도움이 필요한 가족 모두가 함께 가야하는 일이 되었다. 1+1으로 표현되는 덤으로 주는 물건들 앞에서 필요에 의한 구매의지는 흐려지고 만다. 장바구니에 꼼꼼이 물건을 담아 장을 봐 오시던 모습은 마트의 등장과 함께 보기 힘든 모습이 되었다.

필요를 넘어서는 생산과 구매가 상식이 되버린 세상이 되었다. 새물건을 구입하는 이유가 다 쓰거나 수명이 넘어서라기보다 싫증이 나거나 새 물건이 나왔기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핸드폰이나 컴퓨터관련 제품들에서 기기변경은 하나의 상식이 되었다. 새제품 구매 기준은 신모델과 고사양의 제품이 출시에 달려 있다. 사용해오던 물건들의 성능과 기능에 문제가 없음에도 폐기처분 된다.

필요를 넘어서는 소비는 지구의 자원과 자정능력을 결국 환경파괴로 이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구는 지금과 같은 소비와 생산을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100여년 산업화의 결과로 지구의 멸망까지 거론되는 영향을 끼치고 있는 기후변화가 생기는것만 봐도 알 수 있다.

환경파괴로 인한 피해들이 그런 소비를 했던 지역, 나라, 이들에게 돌아간다면 그나마 문제가 쉽게 풀려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결과들은 가장 가난하고 피해에 취약한 지역의 동물, 사람들에게 제일먼저 타격이 간다. 기후변화로 인한 피해를 가장 먼저 보고 있는 지역은 소비를 주도하는 지역이 아니라 극지방이나 가난한 나라의 동물들과 사람들이다. 정작 원인 제공자나 지역에서 변화로 인한 피해를 실감을 하지 못하니 지구의 자정능력을 넘어서는 과잉생산과 소비체제는 계속해서 이뤄지고 있는건지 모른다. 파멸적인 결과는 여유롭게 TV를 보며 가끔씩 느끼고 가책을 느끼는 환경프로그램의 주제일 뿐이다.

대량생산과 소비체제의 방향을 전환할 사고와 행동이 필요할 것이다. 경제에 대한 지식이 없는 내가 어떻게 해야 파멸로 흘러가고 있는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있는지 방법을 알리가 없다. 하지만 짧은 지식과 생각으로 자발적인 가난을 행하는 노력이 그것의 시발점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가난과 빈곤은 구분해야 겠지만 자발적인 가난이 재앙으로 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 첫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가난이라는 말에는 부족하다는 뜻외에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다. 다음은 가난의 의미를 잘표현한 김규항씨의 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개혁파든 극우파든 신자유주의 광신도들의 지배가 지속되는 한 가난한 사람들이 더 힘겨워지는 현실 또한 지속될 것이다. 우리는 이 현실을 바꾸기 위해 연대하고 싸우고 있고 또 싸워야 한다. 그러나 가난보다 더 심각한 위기는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의 품위를 잊어버리는 것이다. 가난은 수치스러운 것인가? 아니다. 가난은 불편하고 때론 참으로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적어도 부유보다는 정당하고 품위 있는 삶의 방식이다.
가난은 적게 소유함으로써 다른 사람의 몫을 늘이는 보다 정당한 삶이며, 적은 땅을 사용하고 적게 소비하고 적게 태움으로써 파괴되어가는 지구에 생명의 도리를 다하는 보다 품위 있는 삶이다. 품위마저 사들인 부자들은 세상에서 가난의 품위라는 것을 도려내기 위해 갖은 애를 쓴다. 바야흐로 품위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 전쟁에서 질 때, 그래서 아이들이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가는 제 아비 어미를 수치스러워하게 될 때 우리 삶도 끝장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