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5월 26, 2008

Phoenix 화성 탐사선 착륙


지난해 8월 발사된 피닉스호는 무려 6억7천500만㎞를 날아간 끝에 50%의 성공 확률을 넘고 25일 화성 북극 부근에 무사히 착륙에 성공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피닉스의 목표는 다음의 네 가지인데 화성 탐사선이 동력을 이용한 연착륙에 성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① Determine whether Life ever arose on Mars
(생명체가 발생했는지의 여부 확인)
② Characterize the Climate of Mars (화성 기후의 분석)
③ Characterize the Geology of Mars (화성 지질의 분석)
④ Prepare for Human Exploration (유인탐험의 준비)

이를 위해 이번 Phoenix 탐사선은 극지역에서 물의 히스토리를 연구하고, 생명체가 서식할 수 있는 지역의 증거를 찾으며, 얼음과 토양층의 경계부에서 생명체의 잠재가능성을 연구할 예정이라고 한다.

음모론에서 보면 화성의 생명체는 물론이고 문명의 흔적들 마저 당연한 상식이지만 NASA의 진지한 노력들을 보면 음모론들이 허망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피닉스가 조사하는 것들도 100% 공개되지는 않을 것이기에 의구심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화성 탐사에 큰발전이 있기를 기대한다.

☞ 더 많은 이미지는 여기에서




퇴행하고 있는 대한민국


2MB가 죽지도 않은 경제를 살리겠다며 압도적인 지지율로 당선 되어 대통령이 된지 석달이 되었다. 그 석달동안에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국토를 작정하고 망가뜨릴 대운하 사업을 밀실에서 불도저같이 밀고 나가고 전임정부에서도 욕먹으며 마련한 30개월 이상 소의 수입금지조치 마저 없애려 한다. 그러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일들을 비과학적인 괴담으로 치부 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법에 보장된 정당한 의사표현을 빌미삼아 학교에 까지 경찰들이 쳐들어 가고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협박을 벌이는 만행이 벌어지고 있다. 대통령 하나 바뀌었을 뿐인데 어떻게 이런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2MB의 닭짓은 '오렌지' 발음으로 대표되는 영어심화학습을 시작으로 경제, 외교, 국방, 통일,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 걸친 보편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전면 개방 문제에 이르러서는 초중고생들까지 거리로 나서 그를 반대하게 만들고 있다. 취임한지 고작 100일이 되지 않아 20%초반대의 지지율을 기록해도 분위기 파악을 못하는 모양이다. 협박인지 어름장인지 모를 대국민 성명을 하더니 급기야는 평화적으로 이뤄지던 시위에 물대포를 쏘아대며 진압하고 시민들을 연행해 갔다.

2MB의 눈에는 촛불시위에서 주장하는 말들이 비과학적인 괴담에서 비롯된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못된 배후세력에게 조종되고 있는 시위세력을 폭력으로라도 진압하는게 옳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광우병에 대한 걱정을 과학적인 자세로 계몽하려는 2MB의 감각기관에는 자기 생각과 다른 얘기들은 전혀 들어올 여지가 없을 것이다. 아마도 무지몽매한 자국의 국민들을 과학적인 지식으로 깨우치게 했으니 미국과 일본도 거짓선동에서 비롯된 괴담에서 깨어나게 노력할지도 모를 일이다. 광우병이 발생한 EU산 쇠고기의 수입을 막고 있고 미국과 20개월 미만의 소에서는 광우병이 발견된 적이 없다면서 20개월 미만의 쇠고기만 수입하겠다는 일본은 얼마나 딱하게 보일까.

흔히들 노무현 정권이 좌측깜빡이를 켜고 가다가 갑자기 우측으로 돌아가면서 그를 지지하던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고 많은 욕을 얻어 먹었다는 말들을 한다. 그런 노무현 정권을 2MB는 '아마추어'라 불렀다. 대한민국의 발전을 거꾸로 되돌리려 하고 있다. 그리고 2MB의 행동들을 보면 그런 '아마추어' 수준에도 한참 모잘라 보인다. 거리에 설치해 놓은 5.18 시민게시판에 대통령을 비난하는 초등학생들의 글이 올라왔었다고 한다. 앞으로 초등학교에까지 경찰들이 쳐들어 갈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나라는 어쩌다 저런자를 대통령으로 뽑고말았을까.

금요일, 5월 16, 2008

스승의 날?


경찰이 수업중인 학생을 불러 조사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기사를 보면서 경찰이 학교를 찾아 갔다는 것에서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않았다. 정권이 바뀔때마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끔 알아서 움직이는 그들이 예전의 버릇을 되살리는듯한 모습은 특별한 것도 아니다. 미친소의 수입 반대 촛불문화제의 찾을것도 없을거 같은 배후를 밝히겠다는 정부의 닭짓을 여전히 아무 생각없이 따라 한것 뿐인 것이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서민들 앞에선느 군림하려들고 권력앞에서는 알아서 기는 그들눈에 하찮아 보이는 학생하나 조사하러 가는데 무슨 깊은 생각을 하고 갔겠는가.

이 기사에서 정작 놀랐던건 그 학교 교사들의 태도 때문이었다. 다음의 기사를 읽어 보자.

"지난 6일 학교에서 한국 지리 수업을 받고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이 갑자기 교실로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귀를 잡아끌었다"며 "어디로 누굴 만나러 가는지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학생 주임실로 끌려가보니 경찰이 앉아있었다"고 밝혔다.

학생을 데려오라는 경찰의 지시에 순순히 복종해서 수업중인 학생을 끌고 갔다는 것이다. 현행범이거나 긴박한 상황에서 체포해야 하는 상황이 아니었다면 학생들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교사라면 당연히 먼저 경찰을 제지 했어야 하는것 아니었을까? 학교가 뭐하는 곳이라는 인식과 교사라는 직업의식이 닭머리의 100분의 1만큼이라도 있었다면 경찰이 부른다고 수업중인 학생을 그렇게 끌고 나갈 수 있었을까? 이것만으로도 놀랄 일이지만, 그 이후 교사들 사이에 '사고친 학생'이라는 식의 소문이 퍼져서 학생을 비난했다는 대목은 더더욱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런 참담한 기사를 '스승의 날'에 읽어야 했다. 내 기억을 더듬어도 그렇고 요즘의 학교는 미친듯이 공부해서 일류대학을 가는게 제일이라는 것 외에는 별다르게 배울것이 없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으나 교사라는 직업에 '스승'이라는 낱말을 붙이는건 공교육 기관 교사의 역할에 대해 마지막 기대는 버리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교사는 학생들의 가치관 확립을 위한 인성교육과 함께 외부의 압력으로부터도 학생들을 보호할줄 알아야 한다. 이번 일은 교사들 스스로 권위와 체면을 깍아내린 수치스러운 일로 인식해야 한다.

무책임한 교사들은 아무소리 말고 조용히 공부만 하기를 원하겠지만 미친소 사태를 겪으며 이미 학생들은 정부와 유력언론들이 왜곡과 거짓을 밥먹듯 한다는걸 확실이 알게 되었다.

금요일, 5월 09, 2008

성화봉송 SHOW!


출근길 전철속에서 였다. 옆에 서있던 이가 보고 있던 무가지 신문에서 깜짝놀랄 사진과 제목의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성화 봉송행사를 하고 있는 중국이 성화를 에베레스트 정상에까지 가지고 올라갔다는 것이다. 황당한 느낌외에 다른 기분은 들지 않았다.

초모랑마( 에베레스트 )의 북사면은 티벳의 땅이다. 정상에서 중국국기를 흔들고 성화를 피운건 티벳이 중국땅이라는걸 온세계에 선전하는 정치쇼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 정치쇼를 그곳에서까지 하다니 어찌 황당한 느낌이 들지 않겠는가.

저렇게 시끌벅적한 성화 봉송이란 게 도대체 언제 등장했나 했더니 나치올림픽으로 악명 높은 1936년 베를린올림픽 에서 괴벨스의 기획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베를린 제국 경기장에서 히틀러와 10만 관중이 서로 손을 뻗치며 '하일 히틀러'를 주고받는 가운데 유럽대륙을 돌고 온 성화가 등장했다. 성화는 나치 선전장의 도구로 처음 등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중국이 하고 있는 '성화봉송 쇼'와 중국인들의 행동을 보면 그때 괴벨스의 기획과 독일인들의 반응은 그저 애들 장난이었던거 같다.

저 지겨운 중국 올림픽 빨리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광우병 사태 - 100분 토론 소감.

이번주 문화방송의 <100분>은 '미국산 쇠고기, 안전한가?'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다음날 새벽 지방에 내려 갈일이 있어 일찍 잘 필요가 있었지만 정부측 논객들이 하는 말을 몇마디 듣다 보니 피가 거꾸로 솟는 느낌이 들었고 끝까지 지켜봤다.

정부측은 처음부터 반대론을 '과학적'이라는 말로 누를 작전을 가졌던 모양이었다. 많은 이들이 가지고 있는 불안감을 '과학적'이지 못하다는 말로 누르려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그러나 토론 결과는 정부의 완패였다. 기존 두 차례에 걸쳐 열린 기자 회견의 내용에서 벗어나지 않는 정부 측 설명에 반대 측 전문가는 물론 시민패널, 시청자의 날카로운 문제제기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토론 중간쯤에 있었던 미국에 사는 한인 주부라고 밝힌 이선영 씨의 전화통화는 승패를 결정짓는 분수령이었다. 미국에서는 아무 걱정없이 먹고 있는 소고기가 유독 우리나라 사람들만 '비과학'적인 유언비어로 불안해 한다는 정부 측 입장에 결정타를 먹이는 통쾌한 이야기였다.

통화내용의 일부를 발췌했다.

"미국에 사는 한인 주부다. 저뿐만 아니라 많은 한인 주부들이 오늘 토론을 보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일부 한인단체장들이 미국 쇠고기는 다 먹고 있고 안전한 거라는 발언을 해서 적지 않은 파장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실제 미국에 사는 250만 한인 교민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의 입장은 그분들과는 매우 다르다. 그래서 이번에 성명서까지 발표했다. 저희는 아무런 정치적 근거가 없는 평범한 주부들이었다. 그런데, 저희가 이러고 있어서는 안되겠다 싶어서 미국에 사는 한인 주부들 모임 사이트에서 모여서 성명서 초안을 만들었다. 전 미국, 캐나다까지 포함이다.

지금 미국산 쇠고기가 자국 내에서 안전하게 먹고 있다는 말은 사실과는 상당히 다르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대다수 90% 이상 유통되는 소는 24개월 미만이라고 알고 있는데, 이것과 다른 소(30개월 이상)가 한국에 들어가는데 이것이 같다는 건 논리에 맞지 않다. 24개월 미만이라는 소도 관심 갖고 살펴보면 많은 분들이 채식주의자가 되거나, 육골분 사료를 먹지 않은 소만 구입하려고 방향을 바꿔가고 있다. 그런데 이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없이 똑같이 안전하다고 말하는 정부의 발언에 굉장히 당혹스럽다." (이선영 씨)


2MB는 “(논란을 주도하는 사람들은) 에프티에이(FTA·한-미 자유무역협정)를 반대하는 사람들 아니냐”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또 “쇠고기 협상이 타결됐을 때 정부는 사실 한우농가 대책을 놓고 논란이 빚어질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광우병 얘기로 가더라”며 이렇게 말했다는데 역시 2MB다운 상황인식의 수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최근의 민심 동요를 순수한 먹거리 걱정보다는, 정치적 의도와 연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FTA는 이해관계에 따라 찬·반이 나눠지는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먹거리 문제의 불안함이 그런 경제적인 이해관계와 왜 연관을 짓는가. 참새 머리의 1/10만 생각을 했어도 둘을 연관짓지 않았을 것이다.

퇴임을 목전에 둔 부시앞에서 아무런 논의도 절차도 없이 덜컥 수입개방을 한 그들이 입만열면 ‘근거 없는 선동’과 ‘인터넷 여론의 편향성’ 탓으로 돌린다. 자신의 책임은 다하지 않고 ‘아둔한 국민’을 질책하는 오만한 모습이다.



불안한 먹거리에 대해 불안감을 표출하고 길거리에 쏟아져 나온 어린 학생들을 두고 ‘판단력이 미숙한’아이들 이라며 염려를 표했다. 과연 그럴까? 국민의 건강과 생명 따위는 내팽겨친 시장주의 탈리반으로 불리는 이명박 정부를 옹호하는 세력들이 내놓은 반론들 중에 귀담을 만한 건 딱 한 가지 있었다. ‘한우도 위험하다’ 거기까진 좋다. 그래서? 어차피 한우도 위험하니 미국쇠고기 전면 개방하자? 질병이 있으니 질병을 적극 수입하자? 이게 성숙한 판단력인가? 판단력이 미숙한 건 2MB 정부다.

수요일, 4월 30, 2008

정답없는 세상

다음은 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의 일부라고 한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권리를 수호하는 것은 이익을 옹호하는 것과 같은 뜻인가?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다름은 곳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평화와 불의는 함께 갈 수 있는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뜻인가?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2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위질문의 절반도 생각해보지 못했던거 같다. 질문들의 요지는 세상살이에는 딱히 정답이 없고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다는걸 사회의 문턱으로 나서는 이들에게 각인 시켜주는 목적도 있었을거 같다. 수많은 현자들의 말씀들 통해 '이거다'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지만 현실의 삶에 대입시키는 과정중에 희석되어 없어져 버리거나 곧 약발을 잃게 되고 만다.

세상일에 정답이 없다는걸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도 30대를 훨씬 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는 없었다. 오로지 세상의 정답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가고 있었다. 개인적인 두뇌회전력의 부족에 제일 큰탓이 있겠지만 고등학교 까지 이뤄지던 공교육에도 책임이 일부분 있을 것이라고 본다. 프랑스 학생들이 위와 같은 삶의 본질에 닿는 질문들을 받으며 사회로 나서고 있을 무렵 나는 '대학에만 가면 된다. 그때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말들을 들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에 몇명이 들어갔는지가 중요하던 그곳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재능은 뭐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곰곰이 사유하고 각성할 기회 라는게 애당초 없는 곳이었다. 공교육은 그런거 하라고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여튼 그렇게 서른 넘어서도 자신이 누군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사지선다형 답안에서 답을 찍어낼 궁리를 하며 헤메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상상속의 것이든 진짜이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진리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능력이 점점 커지고, 계속해서 더 완벽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게 된다. 소유는 사람을 수동적이고 게으르게, 오만하게 만든다.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
고트홀트 레싱Gothhold Lessing, <<안티 괴제Anti-Goeze>>(1778)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불안감을 눌러가며 묵묵히 살아 가야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렇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삶의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일 것이다. 삶에 정답이 있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삭막하고 각박 해졌을까? 그래서 이 뒤떨어지는 지력을 소유한 이도 불확실한 세상뒤로 숨어들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칼럼] 인간과 세상에 대한 교육

화요일, 4월 29, 2008

종교는 인민의 아편?

마르크스를 부정적으로 말할때 자주 인용되었던 말이었다. 종교자체를 부정하는 무자비한 공산당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말의 앞뒤를 자름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이 말도 마찬가지의 것이었음을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읽으면서 몇페이지 넘기지 않아 그 말의 출처가 담긴 인용구를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적인 고뇌는 진짜 고뇌의 표현이자 진짜 고뇌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억압받는 창조물의 한숨, 무정한 세상의 정이다. 종교가 생기 없는 상황에서 생기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사람들에게 환상 속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현실에 대한 환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곧 환상이 필요한 현실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비판은 아직 제대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고뇌의 계곡에 대한 비판이며, 그 후광이 바로 종교이다. 비판은 사슬 속에서 진짜가 아닌 상상 속의 꽃들을 솎아냈다.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얻지 못하고 사슬에 묶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떨쳐버리고 진짜 꽃을 딸 수 있게 하려고.
헤겔의 법척학 비판을 위하여(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중
마르크스는 종교를 일방적으로 폄하한게 아니었다. 일반인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러나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현실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종교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잠시 비껴 설 수는 있지만 부조리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것이 없는 종교를 아편에 비유했던 것이다.

한때 종교를 가졌던 적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녔던거 같다. 보통의 아이들보다 죄책감 같은 것도 많이 가졌던거 같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발길이 뜸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별다른 이유없이 완전히 끊어졌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후 다시 다녀야 겠다는 생각에 근처의 장소로 나갔었으나 '이건 아닌데..'하는 회의감이 계속 커져 다시 발길을 끊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들. 사회와 동떨어진 듯한 강론내용들에서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종교들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모시는 신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행동하는데 있다. 신의 전지전능함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종교는 개인의 불안감을 자극해 오로지 교세확장에만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종교들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작년 여름에 온나라를 떠들석하게 했던 아프칸 인질사태를 봐도 그렇다. 자기를 믿는 신도들이 이교도의 손에 잡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그 위대한 신은 도대체 뭘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종교가 말하는대로 라면 하늘나라로 먼저간 이들이 오히려 더 행복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사는곳 근처에 있던 그 교회의 십자가를 보는 느낌은 허무 자체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상 종교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교는 이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이용한다. '사후세계', '영적인 세계'들에 비교적 관심이 많고 대체적으로 인정을 하는 편이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에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는 틀렸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맞다. 사람은 이성을 포기하는 순간 악마가 지배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어수룩함과 군중 본능, 남을 경솔하게 믿어서 속아 넘어가고 싶다는 소망 또는 욕구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속물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고대에도 문제였다. 어수룩하게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어쩌면 순수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성질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악한 사람, 영악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서 와서 형제자매를 이용하고 착취해달라는 초대장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인류의 커다란 약점 중 하나가 된다.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이 현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종교의 성장과 끈질긴 생명력, 또는 기적과 계시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정직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김승욱(번역)| 알마 | 25,000원

이책을 읽고서 비로소 더이상 벽에 걸어놓을 일이 없던 '십자가' 하나를 마음편하게 버릴 수 있었다. 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몇번 했었으나 왠지 가슴에 걸려( 벼락이라도 맞을거 같은 ) 몇년째 따라 다니던 것이었다. 아직 까지는 아무일 없다.

수요일, 4월 23, 2008

변진섭 - 그대에게



봄이면 듣고 싶은 노래중의 하나가 변진섭의 '그대에게'다. 이노래를 들으면 북한강에서 맞이 했던 91년의 봄이 생각난다. 당시 육군참모총장이 시찰하기로된 진지공사로 부대는 두달가까이 화천읍건너편의 KBS송신소 근처에서 숙영을 했다. 숙영지 아래로 보이는 북한강의 물결과 녹색으로 물들어 가던 나무들의 싱그러운 풍경이 노랫말과도 참 잘어울렸다. 용화산을 지나 춘천으로 가는길의 끝으로 가보고 싶던 호기심과 길가에 있던 '소망교회'의 아늑했던 기억도.

목요일, 4월 17, 2008

우열반의 추억

공부에 소질이 없었던 내게 학창시절은 좋은일 보다는 가슴아픈 일들이 더 많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몇일전 유쾌하지 못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중간고사를 마친 후 성적이 나올때쯤의 어느날 오후 자율학습시간이었다. 담임이 들어오더니 몇몇이들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무 설명없이 복도에 나가 '없드려 뻗쳐'를 시켰다. 호명된 이들이 모두 나왔을 무렵 남은 학생들에게 담임의 설명이 있었다. '지금 나간X들은 성적이 00등 이하다!'. 그에게 호명된 이들은 자기가 관리해야할 학생이 아니라 반전체의 평균성적을 떨어뜨려 교사로서의 그의 실적에 피해만 입히는, 그래서 교실 밖으로 내쫓아 버리고 싶은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가끔 '10년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불안한 미래를 그려 볼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앞서 말한 기사를 보면서 세상은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퇴보할 수도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20년전의 교실에서 당해야 했던 잊혀지지 않는 모멸감을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권장을 하고 있다.

'0교시 수업'과 '우열반'을 완전히 '자율화'하겠다는 말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모는 것의 자율화'가 될 위험이 너무나 크다. 오로지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단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되는 사회 분위를 그대로 쫓아 오로지 입시에만 목을 매달고 있는 학교는 이미 전인교육 기관으로써의 위치를 잃은지 오래된 일이다.

우리나라는 기초적인 사회안전망 조차 없다. 초식동물의 군집마냥 가장 뒤처지는 놈이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 담보되는 시스템이다. 거기에 공적 신뢰 따윈 없다. 결국 끝줄에 서지 않으려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왜소하고 불안한 낱개들만 남을 뿐인 평균적인 삶을 교육시키는 학교에 '0교시 수업'과 '우열반'의 자율을 부여하게 되면 어떤 자율을 행하게 될지 너무도 뻔한일이지 않을까.

병적인 지경에 이른 이 나라의 학벌경쟁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져서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매일매일 가시방석 위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킨다. 아이들은 과중한 학습 부담과 과열 경쟁으로 고통받고, 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비와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다.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늘어놓고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학벌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일은 꿈나라의 이야기일 뿐일까. 20년전 일찌감치 교사들의 실적에 도움이 되는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 되었었다. 교사들은 그저 내가 무사히 졸업만 하면 그만인걸로 여기고 출석만 해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비루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을때 때아닌 곳에서 위한을 얻을 수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 잖아요'라는 글을 남기고 목숨을 끊은 학생의 글과 연극을 보면서 였다. 죽은 이의 이야기를 듣고서 위로를 얻었다니 참 잔인한 나였고 시대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매일같이 공부 또 공부 지옥같은 입시전쟁터
어른들의 그 뻔한 얘기 이젠 정말 싫어요
행복과 성적이 정비례하면 우리들의 꿈은 반비례잖아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자율학습 또 보충수업 시험 시험 시험 입시전쟁터
세상은 경쟁 공부 대학 출세 명예 돈
서로 서로 사랑 하고 나줘주는 세상은 어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내 무거운 책가방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아주 공갈 사회책, 따지기만 하는 수학책,
외우기만 하는 과학책, 국어보다 더 중요한 영어책,
부를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얼마나 더 무거워져야 나는 어른이 되나
얼마나 더 야단맞아야 나는 어른이 되나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번 2번 3번 4번 넷 중에서 행복은 몇번
우리들 살고 싶은 사랑 가득한 세상
내 무거운 책가방 속엔 행복은 없고 성적 뿐이죠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화요일, 4월 15, 2008

BEAR GRYLLS knife

등산용 칼이라면 아미나이프밖에 없는줄로 알았었다. 그 생각에 처음으로 '칼'을 들이댔던게 Man vs. Wild였다. 주인공이 조난 상황으로 뛰어들때 항상 휴대하던 세가지 도우였던 '칼, 수통, 부싯돌'을 보면서 아미나이프로 좀 두꺼운 나무를 건드리면 왠지 부러질것 같은 느낌이 괜한 생각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Bear Grylls는 휴대한 칼로 나무 가지를 꺽는 정도를 넘어서 왠만한 나무 한그루를 쓰러뜨리는 용도로 쓸 수도 있었고 생각외로 다용도로 활용했다. 그 프로그램을 처음 보면서 왜 아미나이프를 휴대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자연 스럽게 풀렸다. 만능 칼은 모든걸 만족 시켜주는듯 하면서도 모든 기능에 '결핍'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가 항상 휴대하는 칼은 Bayley Knife라는 회사와 'Man vs. Wild'등의 프로그램을 찍으면서 함께 만든 칼이었다. 작고 단단한 그 칼을 나도 하나 가지고 싶지만 판매가만 70만원 정도에 배송비, 관세등을 따지면 100만원에 육박할것 같아 그냥 맘편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아니 가지고 싶은 장비의 서열 저 바깥쪽으로 밀려 나고 말았다.

그 칼에 대한 호기심은 어쩔 수 없어 그 싸이트에 들어가 소개글을 허접한 실력으로 번역을 해봤다.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The knife - one of man's oldest tools, born out of necessity in his hunt for survival. Times have changed - and so has technology - but to some of us, the knife is still a prime possession. A possession that gives great satisfaction from its ownership and use, knowing that it was given life by a man뭩 mind eye and hand in a time honoured tradition - but with the best of modern materials which can survive generations."

" ... 칼 - 야생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냥에서의 필요로 태어났으며 사람이 사용한 가장 오래된 도구중 하나이다. 시대가 바뀌었고 많은 기술이 발전했지만 일부의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가장 중요한 소유물이다. 칼은 많은 세월을 지나며 그때마다 최고의 재료를 통해 만들어져 가며 이어져 왔다. 그렇게 사람의 마음, 눈, 손을 거쳐가며 발전되어지는 영광스러운 전통을 거쳐가면서 그것만의 의미를 가지게 된걸 안다면 본인의 칼을 소유하고 사용는것이 얼마나 큰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를 알것이다. ... "

Rob Bayley - 제작자의 말.

This practical hand made model was designed in collaboration with Bear Grylls for the 'Man vs. Wild' and 'Born survivor Bear Grylls' TV series. This is 'Bears knife of choice', and as you would expect, it is made to last thanks to a strong full tang assembly method featuring a unique one piece guard.

The design criteria demanded a knife that was not too large, remaining light and slim enough to be carried unobtrusively without getting in the way, yet still perform when required.

Check out the cool bead blasted handle to aid grip, also the hand polished clip point blade made from RWL swedish powder steel for serious use. It comes with Bear's action sheath featuring horizontal carry with extra knife detainment, or on request a traditional full leather pouch-type sheath can be supplied.

Please note: this knife is designed to be used primarily as a high quality cutting tool - it will take hard use but is not a sharpened pry bar.

수공으로 만들어진 이 실용적인 칼은 TV 시리즈 'Man vs. Wild' 와 'Born survivor Bear Grylls'와 함께 만들어졌다. 기대 하듯이 Bears가 선택한 하나의 칼날과 몸체에 견고하게 조립되어진 부품으로 만들어져 있다.

칼이 만들어질때 요구된 디자인의 표준은 다음과 같다. 너무 길지 않고 가볍고 얇음으로써 눈에 잘 띄지 않아 필요로 할때 즉시 사용할 수 있도록 휴대하기 편해야 한다.

손잡이는 쥐기 편하게 물방울 무늬로 산뜻하게 처리되었으며 손잡이와 칼날이 만나는 부위는 스웨덴 RWL사의 powder steel로 처리되어 섬세한 사용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칼을 구매할 경우 여분의 칼을 수납할 수 있는 Bear의 로고가 들어간 칼집을 선택하거나 전통적인 방식인 가죽칼집을 선택할 수 있다.

주의 : 이 칼은 아주 높은 품질의 절단 도구로 만들어졌다. 숫돌로 갈아져서 만들어진 게 아니다.

칼날의 크기 (mm) : 100 x 30 x 4
길 이 (mm) : 215
무 게 (g) : 200
가 격 (GBP) : 350 ( 한화 약 70만원 정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