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4월 29, 2008

종교는 인민의 아편?

마르크스를 부정적으로 말할때 자주 인용되었던 말이었다. 종교자체를 부정하는 무자비한 공산당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말의 앞뒤를 자름에 따라 의미가 크게 달라지게 된다. 이 말도 마찬가지의 것이었음을 최근에 읽고 있는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신은 위대하지 않다'를 읽으면서 몇페이지 넘기지 않아 그 말의 출처가 담긴 인용구를 만나게 되었다.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종교적인 고뇌는 진짜 고뇌의 표현이자 진짜 고뇌에 대한 '항의'이기도 하다. 종교는 억압받는 창조물의 한숨, 무정한 세상의 정이다. 종교가 생기 없는 상황에서 생기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사람들에게 환상 속의 행복을 가져다주는 종교를 폐지하는 것은 진정한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현실에 대한 환상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곧 환상이 필요한 현실을 포기하라는 뜻이다. 따라서 종교비판은 아직 제대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고뇌의 계곡에 대한 비판이며, 그 후광이 바로 종교이다. 비판은 사슬 속에서 진짜가 아닌 상상 속의 꽃들을 솎아냈다. 인간이 환상도 위안도 얻지 못하고 사슬에 묶이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슬을 떨쳐버리고 진짜 꽃을 딸 수 있게 하려고.
헤겔의 법척학 비판을 위하여( Contribution to the Critique of Hegel's Philosophy of Right) 중
마르크스는 종교를 일방적으로 폄하한게 아니었다. 일반인들에게 위로와 위안을 주는 나름대로의 가치를 인정했다. 그러나 현실의 모순을 적극적으로 고쳐나가기 위해서는 현실을 신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응하는 종교의 자세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현실에서 잠시 비껴 설 수는 있지만 부조리를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것이 없는 종교를 아편에 비유했던 것이다.

한때 종교를 가졌던 적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꽤 진지하게 생각하고 다녔던거 같다. 보통의 아이들보다 죄책감 같은 것도 많이 가졌던거 같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는 발길이 뜸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별다른 이유없이 완전히 끊어졌었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지난후 다시 다녀야 겠다는 생각에 근처의 장소로 나갔었으나 '이건 아닌데..'하는 회의감이 계속 커져 다시 발길을 끊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앞뒤가 맞지 않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말씀들. 사회와 동떨어진 듯한 강론내용들에서 괴리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대체로 종교들이 비난을 받는 이유는 그들이 모시는 신의 가르침과는 다르게 행동하는데 있다. 신의 전지전능함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종교는 개인의 불안감을 자극해 오로지 교세확장에만 목적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 종교들이 현실의 문제 앞에서는 무기력하기 짝이 없다. 작년 여름에 온나라를 떠들석하게 했던 아프칸 인질사태를 봐도 그렇다. 자기를 믿는 신도들이 이교도의 손에 잡혀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데 그 위대한 신은 도대체 뭘하고 있는 것이었을까. 종교가 말하는대로 라면 하늘나라로 먼저간 이들이 오히려 더 행복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때 내가 사는곳 근처에 있던 그 교회의 십자가를 보는 느낌은 허무 자체였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이상 종교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종교는 이런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알고 이용한다. '사후세계', '영적인 세계'들에 비교적 관심이 많고 대체적으로 인정을 하는 편이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들에 맹목적인 믿음을 강요하는 종교는 틀렸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 맞다. 사람은 이성을 포기하는 순간 악마가 지배하게 된다.

사람들이 자신의 어수룩함과 군중 본능, 남을 경솔하게 믿어서 속아 넘어가고 싶다는 소망 또는 욕구를 어떻게 드러내는지 알아차리는 것은 속물적인 행동이 아니다. 이것은 고대에도 문제였다. 어수룩하게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어쩌면 순수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런 성질이 그 자체로는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악한 사람, 영악한 사람들에게 이것은 어서 와서 형제자매를 이용하고 착취해달라는 초대장이나 다름없다는 점에서 인류의 커다란 약점 중 하나가 된다. 끈질기게 사라지지 않는 이 현상을 고려하지 않고서는 종교의 성장과 끈질긴 생명력, 또는 기적과 계시가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정직하게 설명할 도리가 없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김승욱(번역)| 알마 | 25,000원

이책을 읽고서 비로소 더이상 벽에 걸어놓을 일이 없던 '십자가' 하나를 마음편하게 버릴 수 있었다. 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몇번 했었으나 왠지 가슴에 걸려( 벼락이라도 맞을거 같은 ) 몇년째 따라 다니던 것이었다. 아직 까지는 아무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