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에 소질이 없었던 내게 학창시절은 좋은일 보다는 가슴아픈 일들이 더 많이 추억으로 남아 있다. 몇일전 유쾌하지 못한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게 하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중간고사를 마친 후 성적이 나올때쯤의 어느날 오후 자율학습시간이었다. 담임이 들어오더니 몇몇이들의 이름을 부르더니 아무 설명없이 복도에 나가 '없드려 뻗쳐'를 시켰다. 호명된 이들이 모두 나왔을 무렵 남은 학생들에게 담임의 설명이 있었다. '지금 나간X들은 성적이 00등 이하다!'. 그에게 호명된 이들은 자기가 관리해야할 학생이 아니라 반전체의 평균성적을 떨어뜨려 교사로서의 그의 실적에 피해만 입히는, 그래서 교실 밖으로 내쫓아 버리고 싶은 존재일 뿐이었던 것이다.
가끔 '10년후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데..'라는 생각을 하면서 불안한 미래를 그려 볼때가 있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게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앞서 말한 기사를 보면서 세상은 그렇게 빨리 변하지 않고 오히려 더 퇴보할 수도 있다는걸 알 수 있었다. 20년전의 교실에서 당해야 했던 잊혀지지 않는 모멸감을 이제는 정부가 앞장서서 권장을 하고 있다.
'0교시 수업'과 '우열반'을 완전히 '자율화'하겠다는 말은 언뜻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학생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죽음으로 내모는 것의 자율화'가 될 위험이 너무나 크다. 오로지 성공은 곧 돈이라는 거. 돈 없으면 무시당한다는 거. 그 경쟁에서의 낙오는 인생 실패를 의미한단 거. 그렇게 경제논리로 일관된 협박과 회유로 훈육되는 사회 분위를 그대로 쫓아 오로지 입시에만 목을 매달고 있는 학교는 이미 전인교육 기관으로써의 위치를 잃은지 오래된 일이다.
우리나라는 기초적인 사회안전망 조차 없다. 초식동물의 군집마냥 가장 뒤처지는 놈이 포식자의 먹이가 되어 나머지의 안전이 잠정 담보되는 시스템이다. 거기에 공적 신뢰 따윈 없다. 결국 끝줄에 서지 않으려 끊임없이 서로를 경계하며 두리번거리는 왜소하고 불안한 낱개들만 남을 뿐인 평균적인 삶을 교육시키는 학교에 '0교시 수업'과 '우열반'의 자율을 부여하게 되면 어떤 자율을 행하게 될지 너무도 뻔한일이지 않을까.
병적인 지경에 이른 이 나라의 학벌경쟁 때문에 부모들은 아이들의 성적이 떨어져서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며 매일매일 가시방석 위에서 살아야 한다. 그리고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이들에게 사교육을 시킨다. 아이들은 과중한 학습 부담과 과열 경쟁으로 고통받고, 부모들은 과중한 사교육비와 불안으로 고통받고 있다.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늘어놓고 무한경쟁을 강요하는 학벌사회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는 일은 꿈나라의 이야기일 뿐일까. 20년전 일찌감치 교사들의 실적에 도움이 되는 '좋은 대학'으로의 진학은 나랑 상관없는 일이 되었었다. 교사들은 그저 내가 무사히 졸업만 하면 그만인걸로 여기고 출석만 해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렇게 비루한 생활이 이어지고 있을때 때아닌 곳에서 위한을 얻을 수 있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 잖아요'라는 글을 남기고 목숨을 끊은 학생의 글과 연극을 보면서 였다. 죽은 이의 이야기를 듣고서 위로를 얻었다니 참 잔인한 나였고 시대였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쟎아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매일같이 공부 또 공부 지옥같은 입시전쟁터
어른들의 그 뻔한 얘기 이젠 정말 싫어요
행복과 성적이 정비례하면 우리들의 꿈은 반비례잖아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자율학습 또 보충수업 시험 시험 시험 입시전쟁터
세상은 경쟁 공부 대학 출세 명예 돈
서로 서로 사랑 하고 나줘주는 세상은 어디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내 무거운 책가방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아주 공갈 사회책, 따지기만 하는 수학책,
외우기만 하는 과학책, 국어보다 더 중요한 영어책,
부를게 없는 음악책, 꿈이 없는 국어책
얼마나 더 무거워져야 나는 어른이 되나
얼마나 더 야단맞아야 나는 어른이 되나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1번 2번 3번 4번 넷 중에서 행복은 몇번
우리들 살고 싶은 사랑 가득한 세상
내 무거운 책가방 속엔 행복은 없고 성적 뿐이죠
행복은 그 잘난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목요일, 4월 17, 2008
우열반의 추억
작성자: rumfox 시간: 12:07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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