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3월 20, 2008

마이크로 트렌드


학생때부터 산을 좋아했다. 가까이 있었던 지리산을 주로 찾으며 야영과 워킹을 즐겼다. '등산'이라는 말은 흔히 걷는 산행을 말할때 쓰인다. 그래서 취미를 적어야 할때는 '등산'이라고 썼었다. 전문등반을 접하고 나서는 한동안 일반등산을 벗어났다는 우쭐한 기분을 가졌었다. 그래서 등산이라는 말로는 취미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암·빙벽등반 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은 그렇게 세가지 밖에 없늘걸로 생각했었다.

모두들 비슷한 모습으로 산을 찾지만 그 양상들이 같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전문등반이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것에는 틀림없었지만 뭔지 모를 허전함이 항상 붙어 다녔다. 예전에 혼자 찾은 지리산에서 몇일밤을 보내던 때의 즐거움들이 그리워 졌었다. 그동안 못했던 워킹산행에 대한 그리움 때문 이라고 생각해 그런 모임을 쫓아갔던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Joe's Ultralight Backpacking이라는 싸이트를 접하면서 부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산행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무릎과 허리에 오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휴대하는 장비들은 유지하면서 무게를 줄이는 방식으로 더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Joe의 말을 보면서 전문등반과 일반산행이라는 획일적으로 구분되는 등산방식에서 혼란을 느꼈던 것이었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전혀 다른 양상의 것들을 즐길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산행은 산속에서 조용히 밤을 맞이하고 아침을 맞이 하는 것이었다. 내가 느꼈던 허전함의 근원도 거기에 있었다. 산행의 방식은 단어 몇개로 정의될 수가 없는 것이었고 개인의 선택가능성도 사실 무한한 것이다.

사회적 통념이 주로 사회를 사람들 사이의 공통분모를 향해 움직이게 한다면, '마이크로트렌드'는 개성을 향한 인간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포드식의 초창기 경제가 스타벅스 경제로 대체되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택의 폭을 넓혀 자기표현과 만족의 기회를 이끌어내는 경제로 말이다.

거대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며 우리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치는 트렌드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세상의 이면에 숨어 작동하는 일련의 강력한 열망과 힘들이 점점 더 세계의 모습을 형성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 속에 예기치 않은 변화의 씨가 들어 있다.

'마이크로트렌드'는 주류에서 벗어나 괴짜로 치부되기 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비슷한 취향을 지닌이들의 움직임이 기존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고 사회에 새로운 영역을 추가할 수 있다는 논리를 구체적인 통계를 근거로 설명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문과 책의 마지막에 요약되어 설명되고 있다. 저자의 생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좀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해 지루한 것들도 있어 몇몇 장은 건너 뛰기도 했다. 사회적 괴짜들의 얘기를 통해 기발한 이야기들이 이어지기를 바랬는데 비슷한 유형들의 이야기가 별다른 흥미의 곡선없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굳이 기존의 체계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고 새로운 모습을 뛸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너무도 당연하지만 )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건 책에서 얻은 성과였다.

취미, 교육, 직장, 종교, 결혼 여부 등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결심에 달린 문제가 되면 '통합성', '공동체', 단일민족, 보편적인 민족성 같은 건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건국 신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그런 국가 차원의 통일성이 어느나라에서도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요원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많은 방언이 사용돼 왔고, 하나의 이념을 선택하는 문제를 두고 전쟁이 벌어졌던것도 불과 50년 전의 일이었다.

21세기 사회가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갈라지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는 것을 비관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현상이 피해갈 수도 없고 결국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돌아가고 개인의 선택이 확실하게 표현되는 세상에서는 개인의 가치와 공공의 자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격심한 갈등을 관리하는게 더 힘들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 차원의 간단한 해법 같은건 없을 것이다. 혹여 그런 게 있다는 뜻을 비치려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국민은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세계는 사람들이 돈, 시간, 에너지, 선거권, 사랑 등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숲을 보려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지금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글이 오르는 시대다 보니 사람들이 그 이면에 깔린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사실보다는 자기 자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통계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들의 삶에서 진실된 패턴을 보지 못하기가 태반이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제한된 관점을 바탕으로 진실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아주 독단적이고 동시에 아주 그릇된 사회적 통념이 나타나는 경향이 생긴다.

지난 몇 년의 세월동안 나는 경제가 어떨 거라는 믿음과 실제 경제의 상태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통계자료가 실제로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주로 언론의 눈을 통해 경제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1992년 국민들은 경제에 대한 우려를 바탕으로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선거 후에 나온 통계자료를 통해 그해 11월까지가 기록적인 경제 성장기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경기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부정적 시각을 가진 시기가 실제로는 경기 회복기였던 것이다.


앞전의 글과 비슷한 말이다. 구체적인 사실과확인을 하지 않는 대중은 무책임한 정치가들의 선전·선동에 현혹되기 쉽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현실인식에서 빚어진 사회적 통념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먼저 돌아 간다는 것이다. 사회 지식인의 책임도 있지만 스스로 정치인들 주장의 이면을 들춰보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이면들을 들춰보고 확인하려는 작은 노력들이 시작된다면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공약과 선동은 발붙이기 힘들어 질것이다.

자신의 제한된 관점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면을 더 깊이 파헤치려 노력하면 세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발전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작은 힘들이 내일의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