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3월 17, 2008

DSLR을 준비하면서.

DSLR을 하나 장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기종들을 선택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필름 10롤을 더 샀다. 새물건을 구매할 생각은 없고 천천히 기다리며 괜찮은 매물로 나오는 중고 제품을 선택하려는 목적이다. 사실 사진에서 디지털이 주류가 된건 오래전의 일이다. 독일 아그파 사는 파산했고 코닥은 흑백 인화지 생산을 중단했다. 콘탁스 카메라를 실질적으로 생산해온 교세라 그룹의 카메라 시장 철수와 코니카-미놀타의 카메라 사업 포기, 니콘의 필름 카메라 생상 중단과 캐논 DSLR의 세계 시장 석권은 디지털로 기울어진 사진계의 현황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동안 수시로 SLR 클럽을 기웃거려 왔지만 굳이 DSLR을 장만해야 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필름에 대한 특별한 매력이나 가치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뭣보다 DSLR의 부담스런 가격이 구매로 나서지 못하게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기껏 내 아이들 사진찍는 정도의 사진활동을 하던 수준의 나에게는 회사에서 선물로 나왔던 후지 F450과 간간이 소모하는 필름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DSLR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건 최근들어 다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터이다. 필름을 넣으면 더 공을들여 찍게 되는면은 있지만 필름의 구매·현상·인화에 드는 시간과 비용의 부담, 그리고 스캔과정에 드는 노력들까지 모든 과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필름과 디지털의 결과물의 차이를 구분할 만한 눈을 가지지 못했고 필름으로 찍어도 어차피 결과물은 디지털로 인화되는 요즘의 환경에서 그런걸 따지는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은 필름의 풍부한 색감이나 깊은 맛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었지만 1,000만 화소가 상식이 되면서 부터 디지털의 결과물은 35mm 필름을 넘어 중형포맷의 화질을 넘어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전의 정점에 다다랐던 필름과 물이오르고 있는 디지털 소자는 애초부터 경쟁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이 뭐가 뭔지 모르던때 사진가 최민식씨의 사진을 몇장 보고 나도 저런 사진을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다가 반년정도 구미에 내려가서 일을 하게 되었었다. 어느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어 아끼게 된 교통비, 식사비를 모으로 모아 카메라를 구입할 마음을 먹었었다. 그때는 사진을 시작하는 이에게 누구나 손쉽게 추천하고 구입하게 되는 카메라가 니콘의 FM-2였었다. 목돈을 쓰는 일이어서 어렵게 확보한 자료들로 니콘의 F-90X, 캐논의 EOS-55, EOS-5를 놓구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 단하나 - 구입한 카메라인 캐논의 EOS-5로 선택했다.

비개인후의 햇살이 무척 싱그러웠던 봄날 토요일 오전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테크노 마트의 한 가게에서 EOS-5를 샀다. 그리고 다음날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이 포함된 일행과 같이간 서울랜드에서 첫개시를 했었다. 사진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 쉽게도 셔트를 눌렀던 기억과 셔트소리가 기억에 새록새록 하다. 구미로 내려온후 구내 매장에서 사진을 찾은 후 처음으로 받아본 결과물에 참 많은 감동을 했던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구도고 뭐고 없는 그저 사람들만 나온 사진이었지만 새카메라와 필름냄새와 벚꽃날리던 놀이공원의 봄내음, 놀이공원의 화려한 색상까지 가득 담긴 사진을 들고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몇번을 반복해 다시 봤었다.

DSLR을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EOS-5를 꺼내 천천히 살펴 보았다. 군데 군데 사용흔적들이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처음 내손에 들어왔을때의 느낌그대로 새 카메라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의 수명과는 상관없이 이제 퇴물 신세를 면치 못하는듯한 모습이 애처롭기 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트렌드에는 그에 대응되는 카운터트렌드(countertrend)가 존재한다. 모두가 현대화를 외치면, 과거의 가치를 계속 고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모두가 순간순간의 정보를 알아내느라 바쁜 와중에 오랫동안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해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DSLR이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까지 포기하지는 못할거 같다. 편의성과 결과물에서는 경쟁이 될 수 없지만 필름이 가진 감성의 영역까지 디지털은 영원히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상한 슬라이드 필름을 라이트 박스위에서 루페로 들여다 보면서 느끼는 경이로움은 디지털은 영원히 넘보지 못할 필름만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필름은 지난 160년간 누군가의 인생 또는 타인의 삶의 한순간을 기록해왔다. 때로 찍은 후 수고스럽고 느리고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그 결과물에 대해 만족해하고 행복해할 수 있도록 만든것은 필름만의 독점적인 특권이다. 만일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이 가졌던 '설렘의 추억'마저 가져가려 한다면 그것처럼 염치없는 짓은 없을 것이다.

"카메라가 정밀해지고 자동화되며 정확해질수록, 사진가는 스스로를 무장해제시키거나 자신은 사실상( 온갖 카메라 장비로 ) 무장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충동에 빠지게 되며, 근대 이전의 카메라 기술이 낳은 제약에 스스로 복종하고 싶어한다. 훨씬 투박하고 성능도 덜한 기계가 훨씬 흥미롭고 표현력도 풍부한 결과를 가져오고, 창조적인 우발성이 일어날 여지를 더 많이 남겨준다고 믿으며 말이다."
- 수전 손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