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3월 27, 2008

봄의 시작 - 텃밭 갈아 엎기.

'어쨌든' 봄은 왔다. 아파트 창문 밑으로 목련나무의 꽃망울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올해도 텃밭 농사를 시작했다. 오랫만에 삽질을 한탓에 허리에 무리가 왔지만 가을까지 넉넉한 채소들로 채워질 밥상에 비하면 사소한 통증일 것이다. 열평이 채 안되는 땅에서 일구는 농사지만 이속에서도 계절의 변화와 자연의 섭리를 고스란히 느낀다. 화학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텃밭의 채소들은 사람의 손길이 조금이라도 뜸해지면 곧장 '잡초'들로 뒤덮이게 된다. 그런 잡초들의 끈질긴 생명력이 싫었지만 원래 이곳이 그들의 터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의 손길이 끊어지면 곧장 생존의 위협을 받고마는 채소들이야말로 사람들의 힘을 빌려 '잡초'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건 아닐까.


밭을 갈아 엎는 동안 흙의 질이 좋아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텃밭농사를 시작할때와 비교하면 손에 만져지는 흙의 느낌이 다르고 지렁이들이 많아진것만 봐도 확실히 땅이 좋아졌다. 작년 가을 무·배추를 키우기 위해 흙살림의 유기농 퇴비를 사용 했던게 효과를 보는거 같다. 값싼 퇴비를 사용했었으나 출처가 의심스러운 톱밥으로 만들어진 퇴비의 효용성에 의구심이 들었다. 알고 보니 알게 모르게 화학농약과 비료를 사용하는 경우를 꽤 봤다. 텃밭에서 굳이 그것들을 사용해가면서까지 농작물을 키우는 의미가 있을까 싶어도 성장속도와 수확물에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유기농 퇴비와 목초액을 사용하고 나서부터는 격차를 많이 줄였다. 드디어 지난 가을에는 밭에서 거의 유일하게 속이 꽉찬 배추와 무우를 수확했다.

무우씨를 심고나면 맨먼저 싹을 틔우고 나와 무우뿌리를 키워가다가 마지막까지 남아 밥상을 채워주는 무우 시래기의 모습에서는 세상의 근원적인 진리를 느끼는 뭉쿨함도 있었다. 자연과 우주의 근원적인 원리와 진리를 만나는 즐거움이 이봄과 함께 또 시작되었다.

헌책방

2000년도 겨울이었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헌책방을 순례하는 시민기자 최종규씨의 연재기사가 눈에 띄었다. 꼬깃꼬깃 쌓이고 꽂혀있는 서가에서 책 찾는걸 좋아하지만 그때까지의 내게 헌책방은 일부러 찾아가는 곳은 아니었다. 그때쯤 한참 갈피를 잡지 못하는 생활들이 이어지고 있을 때였다. 우연인지 몇달단위로 이어지는 프로젝트 장소마다 헌책방이 있었다. 먼저 회기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을 때였다. 김종규씨의 글을 보고 먼저 그곳으로 찾아 갔다. 몇년동안 이어서 읽지 않고 있었던 '로마인 이야기'를 그곳에서 다시 구입해 보기 시작했다. 소통의 경로들이 모두 닫혀있던 그때 그렇게 찾아간 헌책방과 책은 세상과의 유일한 소통의 경로가 되어갔다. 그곳에서의 일이 끝나고 다음 일터로 옮겼던 곳에도 헌책방이 있었다. 삶의 고단함이 그대로 녹아있는듯한 수더분한 주인 내외의 모습에 친근감을 느꼈고 매일 퇴근하는 길마다 들렀다. 내 삶에 책이 본격적으로 가까워 지기 시작했던건 그렇게 헌책방을 드나들기 시작하면서 였던거 같다.

헌책에서는 뜻하지 않는 글귀나 저자의 친필 서명을 만날때가 있다. 노량진에서 있는 모임때마다 들러는 헌책방에서 구입한 책에 있던 글귀는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다. "태고적 공룡의 머리를 적셨을 비.." 뭉쿨했던 느낌은 BBC에서 만들어진 공룡에 관한 다큐멘터리의 시그널 화면에서 달을 봤을때 느꼈던 묘한 느낌의 근원을 알게 해주었다. 태고적 공룡들도 바라봤을 달을 지금의 내가 보고 있다는 느낌 그것이었다. 그런 글귀를 쓴 사람이 누군지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고에 공룡의 머리를 적셨을
비가
오늘 내 머리에도 내린다.
위안이 된다.

1994.6.25. 신촌문고에서

목요일, 3월 20, 2008

마이크로 트렌드


학생때부터 산을 좋아했다. 가까이 있었던 지리산을 주로 찾으며 야영과 워킹을 즐겼다. '등산'이라는 말은 흔히 걷는 산행을 말할때 쓰인다. 그래서 취미를 적어야 할때는 '등산'이라고 썼었다. 전문등반을 접하고 나서는 한동안 일반등산을 벗어났다는 우쭐한 기분을 가졌었다. 그래서 등산이라는 말로는 취미를 표현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해 암·빙벽등반 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산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은 그렇게 세가지 밖에 없늘걸로 생각했었다.

모두들 비슷한 모습으로 산을 찾지만 그 양상들이 같지 않다는걸 알게 되었다. 전문등반이 특별한 즐거움을 주는 것에는 틀림없었지만 뭔지 모를 허전함이 항상 붙어 다녔다. 예전에 혼자 찾은 지리산에서 몇일밤을 보내던 때의 즐거움들이 그리워 졌었다. 그동안 못했던 워킹산행에 대한 그리움 때문 이라고 생각해 그런 모임을 쫓아갔던 적도 있었지만 여전히 허전함은 채워지지 않았다.

인터넷에서 Joe's Ultralight Backpacking이라는 싸이트를 접하면서 부터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산행이 뭔지를 알게 되었다. 무릎과 허리에 오는 부담을 줄이기 위해 휴대하는 장비들은 유지하면서 무게를 줄이는 방식으로 더 큰 즐거움을 느끼게 되었다는 Joe의 말을 보면서 전문등반과 일반산행이라는 획일적으로 구분되는 등산방식에서 혼란을 느꼈던 것이었다. 비슷한 모습이지만 전혀 다른 양상의 것들을 즐길 수 있는 여지는 얼마든지 있는 것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산행은 산속에서 조용히 밤을 맞이하고 아침을 맞이 하는 것이었다. 내가 느꼈던 허전함의 근원도 거기에 있었다. 산행의 방식은 단어 몇개로 정의될 수가 없는 것이었고 개인의 선택가능성도 사실 무한한 것이다.

사회적 통념이 주로 사회를 사람들 사이의 공통분모를 향해 움직이게 한다면, '마이크로트렌드'는 개성을 향한 인간의 움직임을 나타낸다. 서문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포드식의 초창기 경제가 스타벅스 경제로 대체되는 현상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선택의 폭을 넓혀 자기표현과 만족의 기회를 이끌어내는 경제로 말이다.

거대하고 분명하게 나타나며 우리 대부분에게 영향을 미치는 트렌드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세상의 이면에 숨어 작동하는 일련의 강력한 열망과 힘들이 점점 더 세계의 모습을 형성하는 동력이 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힘들 속에 예기치 않은 변화의 씨가 들어 있다.

'마이크로트렌드'는 주류에서 벗어나 괴짜로 치부되기 쉬운 사람들의 이야기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비슷한 취향을 지닌이들의 움직임이 기존 세상의 흐름을 바꿀 수 있고 사회에 새로운 영역을 추가할 수 있다는 논리를 구체적인 통계를 근거로 설명한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문과 책의 마지막에 요약되어 설명되고 있다. 저자의 생각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좀 흥미를 끌기에는 부족해 지루한 것들도 있어 몇몇 장은 건너 뛰기도 했다. 사회적 괴짜들의 얘기를 통해 기발한 이야기들이 이어지기를 바랬는데 비슷한 유형들의 이야기가 별다른 흥미의 곡선없이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굳이 기존의 체계를 따라가지 않아도 되고 새로운 모습을 뛸 수 있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너무도 당연하지만 ) 그것만으로도 새로운 가치를 가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건 책에서 얻은 성과였다.

취미, 교육, 직장, 종교, 결혼 여부 등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의 결심에 달린 문제가 되면 '통합성', '공동체', 단일민족, 보편적인 민족성 같은 건 발붙일 곳이 없게 될 것이다. 건국 신화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머릿속에 그리는 그런 국가 차원의 통일성이 어느나라에서도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요원한 일일 것이다. 우리나라만 해도 수많은 방언이 사용돼 왔고, 하나의 이념을 선택하는 문제를 두고 전쟁이 벌어졌던것도 불과 50년 전의 일이었다.

21세기 사회가 여러 갈래로 갈기갈기 갈라지고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진다는 것을 비관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현상이 피해갈 수도 없고 결국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빠르게 돌아가고 개인의 선택이 확실하게 표현되는 세상에서는 개인의 가치와 공공의 자원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격심한 갈등을 관리하는게 더 힘들 것이다. 이에 대해 국가 차원의 간단한 해법 같은건 없을 것이다. 혹여 그런 게 있다는 뜻을 비치려는 정치인이 있다면 그는 국민은 물론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사실 세계는 사람들이 돈, 시간, 에너지, 선거권, 사랑 등 자신에게 주어진 자원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투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 복잡해지고 더 다양화되고 있다.


사람들은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자세히 살피지 않은 채 숲을 보려하는 경우가 많다. 더구나 지금은 순식간에 인터넷에 글이 오르는 시대다 보니 사람들이 그 이면에 깔린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 어려운 사실보다는 자기 자신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간단히 말해 통계에 의존하지 않고 사람들의 삶에서 진실된 패턴을 보지 못하기가 태반이지만, 여전히 자신만의 제한된 관점을 바탕으로 진실을 이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실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아주 독단적이고 동시에 아주 그릇된 사회적 통념이 나타나는 경향이 생긴다.

지난 몇 년의 세월동안 나는 경제가 어떨 거라는 믿음과 실제 경제의 상태에는 엄청난 괴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통계자료가 실제로 나오기 전까지 사람들은 주로 언론의 눈을 통해 경제를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 1992년 국민들은 경제에 대한 우려를 바탕으로 빌 클린턴을 대통령으로 뽑았지만, 선거 후에 나온 통계자료를 통해 그해 11월까지가 기록적인 경제 성장기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경기에 대해 그 어느 때보다 부정적 시각을 가진 시기가 실제로는 경기 회복기였던 것이다.


앞전의 글과 비슷한 말이다. 구체적인 사실과확인을 하지 않는 대중은 무책임한 정치가들의 선전·선동에 현혹되기 쉽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현실인식에서 빚어진 사회적 통념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사회적 약자들에게 가장 먼저 돌아 간다는 것이다. 사회 지식인의 책임도 있지만 스스로 정치인들 주장의 이면을 들춰보려는 노력도 부족했다. 이면들을 들춰보고 확인하려는 작은 노력들이 시작된다면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공약과 선동은 발붙이기 힘들어 질것이다.

자신의 제한된 관점과 지식의 한계를 인정하고 이면을 더 깊이 파헤치려 노력하면 세상이 잘 알려지지 않은, 눈에 잘 띄지 않는 발전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작은 힘들이 내일의 커다란 변화를 일으킬 것이다.

춘분 - 봄의 시작

오늘은 공식적으로 겨울이 끝나고 봄이 시작되는 절기 춘분이다. 먼저 춘분의 설명을 찾아 봤다.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는 춘분은 만물이 약동하는 시기로 겨울의 속박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때이다. 추운 북쪽지방에서도 "추위는 춘분까지"라고 했다.

일년 중 춘분에서부터 약 20여일이 기온상승이 가장 큰 때이다. 이때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난춘(暖春)시기로 일년 중 농부들이 일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이다. 이때를 두고 옛사람이 말하기를 "하루를 밭 갈지 않으면 일년 내내 배부르지 못하다." 했듯이 동양에서는 이 날을 농경일로 삼고 씨앗을 뿌렸다. 춘분때는 이웃끼리 파종할 씨앗을 바꾸어 종자를 정선한다.

봄을 맞이하는 것이 마냥 맘이 편한것만은 아니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어서 봄을 누구보다 기다렸다. 동지가 지나면서 부터 마음속에서는 봄을 맞이하기 시작하는데 왠지 불편한 이유는 점점 옅어지는 겨울을 지나고 봄을 맞이 하기 때문인거 같다. 요즘 같은 따뜻한 겨울이 되기전의 2월, 3월이면 계절이 바뀌는 설레임을 느끼는 때이기도 했다. 겨울속에 있었던 2월 어느날 이었다. 퇴근을 하고 고속버스터미널 건너편 버스 정류소에서 노량진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겨울외투를 입어야 하는 날씨였지만 찬바람 속에서 언뜻 봄기운이 느껴졌었다. 그때와 같은 뭉쿨한 감동이 빠진채 봄이 어느새 오고 만거 같다.

레이첼 카이슨은 '침묵의 봄'에서 화학농약의 무분별한 사용과 환경오염으로 봄이 와도 더이상 새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경고를 했었다. 이제 나에게도 봄은 겨울을 벗어나는 설레임없이 찾아오고 있다. 그리고 불길하게 느껴지는 소식과 함께.


얼마전에 동해에서 1미터 이상의 몸집을 가진 참치가 2000마리나 포획되었다는 뉴스를 봤다. 이게 왠 일인가 싶었다. 온난화의 영향으로 바다의 수온이 올라갔기 때문에, 원래는 따뜻한 바닷물에서만 잡을 수 있는 고등어나 참치의 포획량이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인접한 바다에서는 보통은 몸길이 70센치 가량의 참치만 잡을 수 있었는데 해수의 온도상승으로 1미터 이상되는 참치들이 근해까지 올라오고 있다는 것이다.


환경운동단체인 그린피스가 공개한 비에드마(Viedma) 빙하의 1930년대 모습(위쪽)과 최근(아래) 모습 비교사진이다. 비에드마 빙하는 칠레-아르헨티나 국경 안데스 산맥을 따라 자리잡은 남파타고니아 빙원에 위치하고 있다. 그린피스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몇 십년 후에는 비에드마 빙하가 사라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고 한다.

봄을 맞이하면서 염세적인 생각을 하는 것일까? 그래도 봄이면 화창한 햇빛과 놀이공원의 화사한 색상들, 물오르는 푸른잎들이 떠오르지만 ...

"자연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조용하였다.
그렇게 즐겁게 재잘거리던 새들은 다 어디로갔는가?
봄은 왔는데 침묵만이 계속되었다.
울새,명금,비둘기, 어치, 굴뚝새, 또 다른 새들의
울음소리로 아침은 밝아 왔는데,
이제는 왠 일인가 새소리 하나 없어졌다.
단지 고요한 침묵만이 저 들판과 숲과
늪 위에 깔려 있을 뿐이다."

레이첼 카이슨 "침묵의 봄" 중에서

월요일, 3월 17, 2008

DSLR을 준비하면서.

DSLR을 하나 장만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기종들을 선택할 시간을 가지기 위해 필름 10롤을 더 샀다. 새물건을 구매할 생각은 없고 천천히 기다리며 괜찮은 매물로 나오는 중고 제품을 선택하려는 목적이다. 사실 사진에서 디지털이 주류가 된건 오래전의 일이다. 독일 아그파 사는 파산했고 코닥은 흑백 인화지 생산을 중단했다. 콘탁스 카메라를 실질적으로 생산해온 교세라 그룹의 카메라 시장 철수와 코니카-미놀타의 카메라 사업 포기, 니콘의 필름 카메라 생상 중단과 캐논 DSLR의 세계 시장 석권은 디지털로 기울어진 사진계의 현황이 어떤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동안 수시로 SLR 클럽을 기웃거려 왔지만 굳이 DSLR을 장만해야 겠다는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다. 필름에 대한 특별한 매력이나 가치를 느껴서가 아니었다. 뭣보다 DSLR의 부담스런 가격이 구매로 나서지 못하게 했던 가장 큰 이유였다. 그리고 기껏 내 아이들 사진찍는 정도의 사진활동을 하던 수준의 나에게는 회사에서 선물로 나왔던 후지 F450과 간간이 소모하는 필름정도면 충분했던 것이다. DSLR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건 최근들어 다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서 부터이다. 필름을 넣으면 더 공을들여 찍게 되는면은 있지만 필름의 구매·현상·인화에 드는 시간과 비용의 부담, 그리고 스캔과정에 드는 노력들까지 모든 과정이 부담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필름과 디지털의 결과물의 차이를 구분할 만한 눈을 가지지 못했고 필름으로 찍어도 어차피 결과물은 디지털로 인화되는 요즘의 환경에서 그런걸 따지는것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디지털은 필름의 풍부한 색감이나 깊은 맛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었지만 1,000만 화소가 상식이 되면서 부터 디지털의 결과물은 35mm 필름을 넘어 중형포맷의 화질을 넘어서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발전의 정점에 다다랐던 필름과 물이오르고 있는 디지털 소자는 애초부터 경쟁대상이 아니었을 것이다.

세상이 뭐가 뭔지 모르던때 사진가 최민식씨의 사진을 몇장 보고 나도 저런 사진을 찍어 보고 싶다는 생각을 가졌었다. 그러다가 반년정도 구미에 내려가서 일을 하게 되었었다. 어느 공장 기숙사에서 지내게 되어 아끼게 된 교통비, 식사비를 모으로 모아 카메라를 구입할 마음을 먹었었다. 그때는 사진을 시작하는 이에게 누구나 손쉽게 추천하고 구입하게 되는 카메라가 니콘의 FM-2였었다. 목돈을 쓰는 일이어서 어렵게 확보한 자료들로 니콘의 F-90X, 캐논의 EOS-55, EOS-5를 놓구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 단하나 - 구입한 카메라인 캐논의 EOS-5로 선택했다.

비개인후의 햇살이 무척 싱그러웠던 봄날 토요일 오전이었다. 서울로 올라와 테크노 마트의 한 가게에서 EOS-5를 샀다. 그리고 다음날 은근히 마음에 두고 있던 여인이 포함된 일행과 같이간 서울랜드에서 첫개시를 했었다. 사진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참 쉽게도 셔트를 눌렀던 기억과 셔트소리가 기억에 새록새록 하다. 구미로 내려온후 구내 매장에서 사진을 찾은 후 처음으로 받아본 결과물에 참 많은 감동을 했던거 같다. 지금 생각하면 구도고 뭐고 없는 그저 사람들만 나온 사진이었지만 새카메라와 필름냄새와 벚꽃날리던 놀이공원의 봄내음, 놀이공원의 화려한 색상까지 가득 담긴 사진을 들고서 설레이는 마음으로 몇번을 반복해 다시 봤었다.

DSLR을 사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후 한동안 사용하지 않았던 EOS-5를 꺼내 천천히 살펴 보았다. 군데 군데 사용흔적들이 있지만 내게는 여전히 처음 내손에 들어왔을때의 느낌그대로 새 카메라처럼 느껴졌다.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카메라의 수명과는 상관없이 이제 퇴물 신세를 면치 못하는듯한 모습이 애처롭기 까지 했다. 하지만 모든 트렌드에는 그에 대응되는 카운터트렌드(countertrend)가 존재한다. 모두가 현대화를 외치면, 과거의 가치를 계속 고수하려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모두가 순간순간의 정보를 알아내느라 바쁜 와중에 오랫동안 깊이 있는 사고를 통해 자세한 정보를 알아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있다.

DSLR이 필름으로 사진을 찍어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까지 포기하지는 못할거 같다. 편의성과 결과물에서는 경쟁이 될 수 없지만 필름이 가진 감성의 영역까지 디지털은 영원히 넘볼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현상한 슬라이드 필름을 라이트 박스위에서 루페로 들여다 보면서 느끼는 경이로움은 디지털은 영원히 넘보지 못할 필름만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필름은 지난 160년간 누군가의 인생 또는 타인의 삶의 한순간을 기록해왔다. 때로 찍은 후 수고스럽고 느리고 고통스럽기까지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그 결과물에 대해 만족해하고 행복해할 수 있도록 만든것은 필름만의 독점적인 특권이다. 만일 디지털 카메라가 필름이 가졌던 '설렘의 추억'마저 가져가려 한다면 그것처럼 염치없는 짓은 없을 것이다.

"카메라가 정밀해지고 자동화되며 정확해질수록, 사진가는 스스로를 무장해제시키거나 자신은 사실상( 온갖 카메라 장비로 ) 무장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려는 충동에 빠지게 되며, 근대 이전의 카메라 기술이 낳은 제약에 스스로 복종하고 싶어한다. 훨씬 투박하고 성능도 덜한 기계가 훨씬 흥미롭고 표현력도 풍부한 결과를 가져오고, 창조적인 우발성이 일어날 여지를 더 많이 남겨준다고 믿으며 말이다."
- 수전 손택

화요일, 3월 11, 2008

Joe's Ultralight Backpacking

우리말로는 '초경량 등반/산행'정도로 해석될 수 있을거 같다. 우연히 발견한 그의 싸이트를 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내 배낭의 크기와 무게에 대해 처음으로 의문을 가지게 했다. 필수품으로 여겼던 콜맨 442버너, 개스랜턴, 1인용 텐트 등등. 머리를 넘어서는 배낭에 필요 이상의 부피와 무게를 차지 하는 것들이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부피와 무게가 많이 줄어 들었다. 위에서 언급한 것들이 손바닥 만한 알콜버너, LED 후레쉬, 타프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가볍게 지고서 더 많은 것들을 보고 느끼자는 그의 생각에 공감을 하면서 그의 얘기를 허접하나마 번역 해보기로 했다.



Joe's Ultralight Backpacking

1. 왜 초경량 산행을 하는가?

답 : 누구나 안전하고 즐겁게 등산을 할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 산행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줄 수 있다. 허리와 무릎이 아파 무거운 배낭을 더이상 매기 힘들어 등산을 포기한 사람들도 산행을 다시 할 수 있도록 해줄 수 있다. 컨디션이 좋은 상태에서의 초경량 산행은 산행에서의 선택 영역을 더욱 확장시켜 줄 것이다. 10-12마일의 산행거리가 더이상 하룻동안 산행의 한계가 되지 못할 것이고, 더많이 보고, 더많이 걷고, 원하는 곳을 더많이 찾아 다닐 수 있게 될 것이다. 산행으로 얻은 어깨의 통증 없이도 캠프에서 편안하게 앉아 쉬거나 장기 산행에 더 많은 음식을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주말 산행의 경우 보통 40파운드 정도의 배낭을 꾸렸고 기간이 더 길어질 경우 60파운드 이상의 배낭을 꾸렸었다. 그 정도 무게의 배낭이면 어느정도 굴곡이 있는 산길에서 하루에 8-10마일 정도 별무리없이 편안한 산행을 할 수 있었다. 이제까지 산행을 나설때면 보통 2~3일치의 배낭을 꾸려왔었고 산행을 시작한 곳에서 별로 멀지 않은곳까지 갈 수 있었다. 매년 이틀 이상 또는 그 이상이 걸리는 빡빡한 일정의 산행을 할 수 있었으나 "그곳 넘어"가지못한 곳에 내가 못본 것들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국립공원에서 일반적으로 찾는 곳을 벗어나 더 먼곳까지 간다는건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물론 가볍게 배낭을 꾸린다는 것이 보통의 무게를 가진 배낭을 졌을때 보다 더 멀리 가야 한다는걸 의미하는건 아니다. 가벼운 배낭은 원할 경우 언제든지 더 멀리 산행을 하는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하고자 하는 산행이 캠프장 반경 5마일 이내에서 하이킹을 증기는 정도라면 당장 그렇게 해도 좋다. 가벼운 배낭을 맸다면 나무 밑에서 일행( 무거운 배낭을 맸던 )이 체력의 회복을 위해 쉬고 있는 동안에도 많은 근처의 봉우리를 오를 체력를 남겨 놓은 상태로 있을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걷는걸 많이많이 좋아한다. 그래서 더 많은 시간을 숲속을 이리저리 헤메며 다니고 싶어한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진 친구들(그 결과 산행을 위해 여분의 시간까지 모두 써야 하는)과 산행을 할때면 나는 남은 체력으로 주위의 경치를 둘러보거나 감상할 수 있고 산행후 야영장소를 정리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

초경량 산행을 함으로써 이전의 주말산행에서는 가보지 못했던 곳까지 산행을 할 수 있게 되면서 더 많이 보고 경험할 수 있게 되었다. 하루에 10~20마일 이상의 거리를 별 부담없이 걸을 수 있고 보통의 산행객들 대열에서 빨리 벗어나 더 멀리 가서 더 많은 것을 보는 즐거움을 누린다.

단지 하룻동안 더많이 여행하게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더 기분좋고 편안하게 산행을 하게 되어 예전에는 가지지 못했던 걷는동안 보는 것들에 대한 관심을 더 많이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진 가축 처럼 땀흘리고 낑낑대는 대신 혼자 묵묵히 걸어갈 길을 걷고 응시하면서 등산로에 있는 나를 둘러싼 모든것들의 소리와 경치들을 듣고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짐을 줄임으로써 더 많이 볼 수 있고, 더 많이 듣게 되었고 더 많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산행의 시간은 산행기점과 야영장 사이를 잇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이 아니라 나름의 즐거운 가치를 가진 시간이 된 것이다.

2. 야외에서 하룻동안 15마일 또는 그 이상 걷는건 너무 빠른것 아닌가? 그렇게 먼 거리를 어떻게 즐기면서 걸을 수 있나?

backpacking을 fastpacking과 같은 시각으보 보면 안된다. 이 둘은 짐을 줄이는 점에서 별개의 구분된 개념이지만 각각이 가진 주된 논점은 짐을 가볍게 짐으로써 더 많은 지역을 산행할 수 있고 그래서 기쁨을 더 많이 누리는 것의 가치를 논한다는데 있다고 생각한다. 장거리 산행객들에게 짐을 줄이는건 어느 지역을 더빨리 둘러보는걸 뜻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걸음으로 더 멀리 산행지역을 둘러 본다는것을 말한다. 그리고 숲속에서 목적지를 향하던 중 멈춰서 다람쥐가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모습과 절벽에서 화살처럼 날아다니는 제비들을 바라보는 시간들은 산행이 가지는 즐거움중의 하나다.

나는 장기간 산행(20마일 이상의)을 할때 휴식시간 포함 시간당 평균 2마일정도를 걷는다. 2 MPH는 짐을 진것과 상관없이 산행을 하는 대부분 사람들의 평균적인 속도라는데 주목 하기 바란다. 단지 나는 10시간 또는 그이상의 시간을( 휴식 포함 ) 느릿느릿 걷는다는 것이 차이일 것이다. 길게, 빠르지는 않게 말이다. 물론 fastpacking의 방식을 즐긴다고 그게 잘못 되었다는게 아니다. 단지 내 스타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느리지만 꾸준하게 걷는게 내 스타일이다.

재밌는건 나는 더 많은 시간을 산행함에도 불구하고( 또는 왜냐면.. ) 대부분의 등산객들보다 더 많은 자연 경치들을 보게 된다는 걸 종종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기억해야 할건 많은 등산객들이 단지 낑낑대며 그들이 갈 다음 야영지까지 가는 것에 비해 초경량 산행객에게 산행시간은 그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을 느낄 수 있는 훌륭한 기회인 것이다. 나는 산행을 멈추고 휴식을 취할때면 충분히 남은 여분의 체력으로 정말로 내 마음에 드는 완벽한 야영장을 찾을 수 있다.

3. 초경량 산행을 하는 이들은 광신적이고 배타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Mr. Joe는 우리를 광신도로 변화되길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사람이 가진 광신의 대상은 또다른 이의 구원이 될 수 있다. *8-) 진지하게 말하자면 나는 아직 초경량 산행을 시작한 등산객을 만나지 못했다. Justin을 제외하고.. :-) ( Hi Justin! ). 우리는 새로운 영역으로 전향을 한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주목받으려는 심리적 이유때문이 아니라 갈피를 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불가능하리만큼 가벼운 짐을 지고도 산행에서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지 알게 되었을때 모두들 놀라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가능하다면 요란스럽게 많은 이들에게 그것이 가능하다는고 알리고 싶다. 당신은 열렬한 은둔자(지지자)들이 하는것처럼 따를 필요는 없다. 어떻게든 다칠 수 없는 살짝 미친이( 매니아 )가 되는건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 *8-)

15년전에 누군가 나에게 그의 배낭 무게가 10파운드 미만이라고 말했다면, 아주 위험한 사람이거나 끔찍한 거짓말장이, 또는 두가지 모두라고 추측 했을 것이다. 요즘의 나는 3-season(봄, 여름, 가을)에 2~5일 정도의 산행시에는 10파운드( 물/음식제외 ) 이하 무게의 배낭을 맨다. Ray Jaodine와 그의 와이프는 Pacific Crest Trail을 하면서 8.5파운드 정도의 배낭을 졌었다.

물론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진정으로 가치를 가지는 개인의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나는 누구라도 다른이를 깔볼 수 있는 옳은 것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 왜냐면 백패킹에 접근하는 각자가 선호하는 다른 길( 우리는 모두 낮은 영향력만 끼칠 수 있다 )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른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내가( 초경량을 추구하는 다른 이들도 ) 원하는건 모든 사람들이 초경량 산행의 가능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은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이 가능하다는 선택이 있더라도 초경량 산행을 고려 하지 않을 것이다(X).
어쨌든 그건 가능하고 당신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다.

☞ 원본보기 : Joe's Ultralight Backpacking

목요일, 3월 06, 2008

정신을 차리자.

이명박 대통령이 기업인들과 직접 통화할 수 있는 '핫라인(Hot-line)'을 만들기로 했다고 한다. '기업인 핫라인'은 청와대 집무실에 별도 유선전화를 두는 것이 아니라 휴대전화를 사용하는데 "퇴근 후에도 전화를 받을수 있어야 한다"는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지난 대선 공약이기도 했던 핫라인은 "이 대통령이 평소 수행비서에 핫라인 전화를 맡겨 연결할 수 있도록 할 것"이라며 "업무시간 이후에는 직접 관저로 가지고 가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리맡에 둘 계획" 이라고 했고 공항의 귀빈실까지 기업인들에게 개방한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기업인들이 어느선까지 이며 누구누구의 전화번호를 말하는건지 모르겠으나 대략 다음의 사진에 나오는 인물정도가 아닐까 하는 추측이 든다.

2MB의 청와대 입성의 일등공신은 부동산 투기와 논문표절에 있어 탁월한 실용성을 가지고 있음을 보이고 있는 그의 측근들이 아니라 2MB가 대통령이 되어 경제만 살려준다면 그동안 그가 저지른 일들은 봐줄 수 있다는 기대심리였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경제가 정말 죽었거나 파탄이 났었는지 의문을 가져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자료들을 찾으려 해도 경제가 죽었었다는걸 증명해줄 자료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한국의 경제상황

이상한건 보수 언론과 야당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며 이지메를 가하던 '좌파정부'에서 국민소득이 꾸준히 상승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일이 있을 수 있을까. 경제가 죽었었다면 하락까지는 아니어도 세계 평균성장율은 고려해 평행선은 그어져야 될거 아닌가. IMF이후 '잃어버린 10년'동안 꾸준한 성장을 거듭해 2007년 말 현재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20,946달러로 2002년의 11,499달러에 비해 거의 2배 가까이 상승했으며, 소위 ‘좌파 정부’가 집권한 98년 이후부터 따지면 근 3배 수준에 도달해 있다. 그 이전의 외환 위기와 이후 환율 정상화를 고려한다 해도 매우 착실히 발전해 왔던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2003년 3.1%, 2004년 4.7%, 2005년 4.2%, 2006년 5.0% 2007년 4.9% 로 OECD 평균을 크게 웃돌 뿐 아니라, 대략 1~ 3 % 대에 머물고 있는 미국, 일본, 캐나다, 프랑스, 독일, 영국,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스페인, 이탈리아, 네덜란드, 벨기에, 핀란드, 오스트리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 대부분의 구미 선진국보다 훨씬 높다. 또 이들 선진국들의 과거 발자취를 돌이켜 보면 국민소득 2만~ 3만 달러 사이에서의 평균 경제성장률은 3.4% 로 현재의 우리나라보다 훨씬 낮았다.

반면 4% 이상의 높은 성장률을 보인 나라들은 유럽에서는 체코, 헝가리, 폴란드, 슬로바키아와 같은 동유럽 나라들, 그리고 중국과 동남아, 중남미의 개발도상국들로 이 나라들의 1인당 국민소득은 많으면 1만 달러를 조금 상회하거나(체코), 적게는 1천 달러 (베트남) 수준이다. 대충 봐도 이제 막 산업화가 진행되고 있는 나라들이란걸 알 수 있다.

그러면 대체 왜들 경제가 죽었다고 난리들일까. 지금 우리가 겪는 경제적 압박은 노무현의 무능과 별반 관련이 없을뿐더러 이명박의 집권으로 시원스레 해결될 일도 아니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하다. 서브프라임 사태와 석유/원자재 값 폭등 및 중국과 동남아 제조업의 약진 등의 국제적 어려움은 말할 것도 없지만, 산업이 성숙기로 접어든 국가에서 겪는 당연한 모습인 것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6,70년대 같은 기적적인 급성장은 가능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제적 성과의 재분배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체질을 개선해 가는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민생경제를 살릴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중요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상황에 대해 극심한 착각과 환상에 빠져 있고, 이병박 정권의 탄생 자체가 바로 이런 오류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고 벗어나지 못하는 한 앞으로 계속 실망에 실망을 거듭할 일만 남았을뿐이라는 점이다. 그런 실망은 우리나라를 점점더 진정한 절망의 늪으로 밀어 넣고 말지도 모른다.

이런 착각과 환상의 배경에는 박정희 전두환 시대처럼 10%에 가까운 성장을 매년 계속해야만 한다는, 아니면 언제 굶어 죽을지 모른다는 기성 세대의 뿌리 깊은 두려움과 피해 망상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더욱더 그런 체제를 심화시켜나가는 쪽으로 사회를 움직여 가고 있다.
지지자들

이런 비이성적인 불안감을 부추겨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세력도 존재하고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 그렇다면 그를 지지하고 부추기는 세력들은 누구일까. 얼마전 참여연대의 설문조사에 이명박 정부가 내정한 장관 내정자 중 결격사유가 있는 내정자를 교체해야 한다는 질문을 했더니 ‘교체해야 한다’는 65.3%, ‘별 문제가 아니므로 교체하지 않아도 된다.’가 32.7% 의 응답을 보였다고 한다. 또한 장관인사기준에서 ‘능력이 뛰어나도 도덕적 기준에 맞지 않으면 제외해야한다’는 응답이 47.9%, 불법적 행위만 없다면 개인능력이 우선이다’는 응답은 41.8%, ‘능력이 뛰어나다면 도덕적 기준은 중요치 않다’는 응답이 9.5%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관의 결격사유가 별 문제가 아니므로 교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32.7%의 국민이었다. 대선에서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것은 최종 투표율 63%를 100%로 볼 때 48.7%였다. 투표율이 63%이므로, 투표권이 있는 성인의 31%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참여연대 조사와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장관내정자의 도덕성이 ‘별 문제가 아니므로 교체하지 않아도 된다.’는 32.7%와 교묘하게 일치된다. 대체 국민의 32%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것이다.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31%가 살려달라는 경제는 뭘까? 그것이 민생일거라고 생각한다면 앞에서 말한 보수언론과 야당의 난리 부루스에 아직 속고 있는 것이다. 절대 아니다. 그들이 말하는 경제는, 아직 부동산과 주식으로 돈을 벌고 싶다는 울부짖음이다. 부동산과 주식으로 돈을 더 벌게 해달라는 메시지인 것이다. 도덕성? 그게 밥 먹여주나? 도덕성 찾는 것=‘무능’, 투기꾼=‘유능’이 되는 세상에서 무슨 도덕성인가?

지지자들의 경제

30대 이상의 사람들은 한국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을 너무 잘 알고 있다. 바로, ‘말뚝 박기’이다. 값어치가 없는 서울 근교의 싼 땅에, ‘신도시개발’이라고 말뚝만 박아놓는 것이다. 그러면 전 국민이 들썩거리면서 다 몰려와 땅값을 올려놓았다. 거기에 콘크리트로 닭장처럼 아파트만 올리면 된다. 그럼 강남의 땅값을 저절로 오른다.

주식? 역시 쉽다. 이명박의 경우를 보자. 회사 하나를 설립해서 제법 이름 알려진 사람이 사장으로 올라선다. 가수 비도 좋고, 현대사장 출신 이명박도 좋고, 연예인 누구도 좋다. 회사 크게 키운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해외도 진출하는 척 한다. 물론 이때 외국지사 하나 설립해 놓으면 더 좋다. 주식 값이 올라간다. 마구 오른다. 직원들에게도 주식을 준다. 직원들도 회사의 주식이 오르니 사 놓는다. 팔고 튄다. 역시 말뚝 박기다. 유명인이 강남에 그럴 듯한 사무실 차려놓고 말뚝만 박아놓으면 됐다. 이게 소위 말하는 역대 정권 경제 살리기였고 국민들은 아직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이명박의 지지자들이 말하는 경제는 민생경제가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수치를 끌어올리기 위한 경제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경제의 부흥을 원하는 사회지도층과 여론 주도층들의 바램과 지지로 이명박은 대통령직에 당선될 수 있었다.

실용주의
이명박 대통령이 내세운 실용주의란 무엇일까. 실용주의는 20세 초, 듀이란 사람에 의해 만들어졌다. 굳이 해석을 하자면 지식에 몰입되지 않고 경험에 따라 행동하는 세계관(?)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실용’이란 말을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왜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이런 사상이 나왔는가 하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유럽은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노동자 착취가 극에 달했다. 유럽은 전통적으로 계급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계급적으로 대립하면서 사회가 변화한다.

계급적 사회가 아니었던 미국은 조금 달랐다. 그때 등장했던 사상이 바로 ‘실용주의’이다. 당시 왜 미국에서 실용주의를 받아들였는지 이해 해야 한다. 20세기 초반 전세계를 휩쓸었던 공산주의가 미국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실용'은 악용하기에 따라 얼마든지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될 수 있는 사상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지식보다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논리는 이념을 배격할 때 방패막이가 되어줄 수 있다.

이명박 정권의 예를 들자면, 이념이란 쓸모없는 것이고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고 있다는 식의 발언을 이미 하고 있지 않은가? 미국은 이 실용주의라는 무기로 교묘하게 자본가들을 보호했고, 그 결과로 유럽보다 더 잘 살면서도 국민의료보험 조차도 확립시키지 못하는 나라로 전락했다고 한다.

이명박 정부는 이 실용이란 말을 세워, 부동산과 논문표절에서 실용적인 일들을 해온 이들을 장관으로 기용해 정책기구에 버젓하게 앉혀 놓았다. 이런 문제있는 인사를 과감하게 행할 수 있는 것은 오만하다고 할 만큼 지나친 자신감, 즉 그의 실용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또 이명박 정부가 또 어떤 실용을 내세워 무슨 짓을 할 지 걱정 된다.

이명박 정권의 좋고 싫음을 떠나 내가 속한 사회, 가정이 편안하기 위해서라도 오류를 가지고 있는 문제점 들에 대한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분별력을 가지고 고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잘못된 현실인식과 정책이 실용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지지 받고 추진된다면 우리나라의 미래는 잃어버린 시간들이 될 것이다.

참조한 글들

국민 32%를 적으로 만들기
[칼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기적이 아니라 상식이다.
우리들의 무서운 적, '실용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