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2월 11, 2017

동대문

서울에서 가장 가보고 싶었던 곳중에 황학동 벼룩시장이 있었다. 지금은 도심 재정비로 없어졌고 그곳의 상인들은 신설동 풍물시장과 동묘공원 근처로 옮겨왔다. 빛바랜 모습들에 흥미를 느끼는 용도를 다하고 새로운 손길을 기다리는 빛바랜 물건들로 넘쳐 나는 이곳이 그런 취향을 더없이 만족 시켜주는 곳이다.
 


오래된 벽에는 그만큼의 시간을 고스란이 보여주는 모습들이 있다. 여러 모양의 돌로 이뤄져 있는 이런 모습도 오랫동안 보수를 거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모습일거 같다.



영화속 액션 장면들이 떠올라서 일까? 텅빈 시장골목은 묘한 재미를 주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자연 스럽게 따라온다. 조금만 더 가도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는 곳인데 이런 조용함이 있는게 신기하다. 평일이면 분주하겠지.



동묘공원 입구의 기둥. 이곳 근쳐 해학 넘치는 분위기로 지나는 이들과의 어색함을 없애주는 어느 노점의 모습을 인상 깊게 보는 곳이었다.



붕괴위험 건물로 지정된 상가건물의 복도너머 보이던 노랑색 택배트럭. 빛과 그림자, 색깔이 좋았다.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즐거운 순간이다.



어떤 규칙을 가지는 패턴이 이어지는 모습은 언제나 눈길을 잡게 된다.



미군이 사용하는 짚차 험비의 방탄용 차량문과 탱크의 무한궤도, 안테나들까지 이런 물건들은 어떻게 이곳까지 올 수 있었을까. 하긴 나도 예전에 서독군이 사용하던 쌍안경을 이베이를 통해 구입했던적이 있다. 군에서 용도가 다한 물건들은 대부분 민간에 불하하는 나라들이 있는거 같다. 전투기 좌석이나 레이더, 심지어는 전투기까지 이베이에 올라오는거 보면 정말 그런거 같다.



토요일, 1월 28, 2017

비내린날 신림동

신림9동의 고시원에서 서울생활을 처음 시작 했었다. 좁고 불편한 곳이었고 다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때의 아련한 기억들은 가끔씩 그곳을 다시 찾고 싶어 지게 한다. 새벽녁 부터 비가 내렸던 그날도 그런 때 였다.



비를 맞은 사물들은 본래의 색을 더 선명하게 낸다. 그냥 지나쳤을 수도 있는 사물들도 비를 맞고 진한 색을 내면서 새롭게 정의 되는거 같다.



고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보니 구석구석에 밥집, 커피집, PC방(그때는 비디오방)으로 가득차 있다.


비가 개이면서 나타난 무지개.



분식집 창가에 놓여 있던 소품.



어떤 다세대 주택 주차장 건너 편으로 보이던 풍경.



어느 식당의 벽에 그려진 벽화.



마을 버스 종점에 있던 공중전화가 그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이 항상 줄을 서 있던 모습은 사라졌다. 낯선곳에 자리를 잡아가며 주체하기 힘들었던 외로움을 달래주던 고마운 존재였다.

금요일, 1월 27, 2017

어떤 만남

별다른 계획 없이 걸을때 우연히 만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고물상 앞에 늘어섰던 폐차장으로 보내질거 같은 상태의 스쿠터 들에서 발견한 모습이다. 의도된 건지 알 수 없으나 이런 순간을 만날땐 정말 행복한 느낌이 든다.   




금정역 근처 골목을 걸으며 만난 순간. 골목 한켠을 찾아든 햇살과 빨강색 자전거의 색깔과 명암이 좋았다. 




산본 고가교 나들이

산본 고가도로 밑을 걸어서 지나갔다. 



먼저 눈에 띄었던 어느 초등학교 운동장 축대에 그려진 벽화.


겨울 햇살에 노랑색이 더 돋보이는거 같다.


굉장한 크기를 실감나게 표현하기 쉽지 않았다. 이런 구조물을 가까이서 보는건 나름 특별한 경험이었다.


나뭇가지에 닿아 흩어지는 겨울햇살과 산본고가교.


조금 더 걷다가 만난 명학역 근처 철도 밑을 통과하는 도로. 명암대비가 돋보여 한장 찍음.


가까이 갈때 두려운 시선으로 집으로 들어갔었다. 지나치니 다시 슬그머니 나와 쳐다본다. 텅빈거리에 나타난 낯선이가 나름 반가웠던 것일까.


자동차 정비소 앞에 있던 용도 미상의 물건. 

목요일, 1월 26, 2017

우연

이태원 어느 골목길이었다. 그래피티(맞나?)를 하는 이들이 그린 노숙인의 모습에 폐업물건을 처리한다는 광고지가 있었다. 디자인의 느낌은 어울리지 않으면서 메세지는 연결되는 우연이 있었다. 왠지 불편하면서 외면하기 힘든 느낌.   


겨울 햇살

겨울 거리에서 만나는 빛들은 더 선명하게 만나게 된다. 23.4도 기울어진 지구의 자전축은 계절마다 다른 햇빛을 뿌린다. 제일 약한 계절이면 이런 빛들의 존재가 더 부각 되는거 같다.  

눈이 부시는 이런 모습도 겨울엔 싫지 않다. 여름이면 어림 없었겠지. 


바깥에 앉기엔 어울리지 않는 기온이었는데 왠일로 의자가 있었다.  

고단한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도구일 것이다. 겨울햇살을 쬐며 잠시 쉬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다. 

남산 언저리에서 봤던 건물이었다. 겨울 햇살을 가득 받고 있는 노랑색이 더욱 도드라 졌었다.   


안양 근처였던거 같다. 나무와 그림자의 조화는 낙엽이 모두 떨어진 겨울에 더 돋보이는 거 같다.


일요일, 4월 03, 2016

동묘 벼룩시장

가끔씩 동묘 벼룩시장을 찾는다. 번잡함 속으로 들어가 색다른 시간을 즐기기도 하고 누군가에게는 효용을 다한 도구들이 새롭게 주인을 만나고 생명력을 가지게 되는 진귀한 광경을 체험하는 것이 즐겁기 때문이다.  

동묘공원 정문앞에 자리잡은 어떤 아저씨의 낙천적인 모습이 인상깊에 기억에 남았었다. 당당한 자신감이랄까? 그런 모습에서 오는 여유와 해학으로 손님을 대하는 모습이 좋았다. 언젠가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내가 어디 잘차려진 매장을 다니면서 이런 느낌의 판매자를 만난 기억이 있었던가? 


동묘에 자리잡기전에는 황학동 일대가 벼룩시장의 중심 이었다. 그곳이 아파트 단지로 재개발 되면서 여기 일대로 왔다.


가끔은 정말 이해하지 못하는 물건들도 있다. 전투기의 캐노피가 어떻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을까.


79년에 지어졌다는 숭인 상가아파는 그동안의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이 담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겹겹이 쌓인 시간이 주는 아련한 느낌을 느끼기도 한다.    


해학적인 모습으로 발길을 잠시 멈추었던 사자상(?) 이다. 중국에서 만들어 진듯한 느낌인데 어느 곳에 두어도 이질감 없이 잘 어울릴거 같다.


우연이 만들어낸 이런 풍경을 만나는게 좋다.


효용이 다해 버려졌던 것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누군가에게는 필요한 물건이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삶의 뭉쿨한 단면을 느끼기도 한다. 몇시간의 즐거운 여행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전철을 탔지만 멀지 않은 시간이 지나면 이곳으로 회귀하게 될거 같다. 그리고 즐거운 구경을 이어갈거 같다.


화요일, 3월 22, 2016

안양 나들이

안양시내를 걸었었다. 광고판과 배달오토바이의 원색이 맑았던 그날의 햇살을 더 돋보이게 했다. 처음 왔을때의 낯설음도 거의 없어졌고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삼청동 골목만큼이나 친숙해졌다. 걷다가 쉬면서 시원한 맥주한잔 마실 곳은 아직 없지만 곧 찾게 되지 않을까. 


사물의 질감을 더 돋보이게도 한다.








화요일, 1월 12, 2016

서촌에서 만난 고택

서촌을 들를때 마다 눈에 띄는 고택이 있다. 지금은 서민들이 살고 있는 가정집이지만 한때 대단한 위세를 가졌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어떤 사연을 담고 있는 집일까 궁금했었는데 뜻밖으로 일제시대의 매국노 윤덕영의 집이었다.  이 일대에 벽수산장이라는 초호화 건물과 14채의 한옥이 있었고 계단위의 한옥은 남산골 한옥마을에 복원되어 있다고 한다. 



아래 글은 뽐뿌게시판( http://goo.gl/5PiUBL )에서 발췌한 글

1873(고종 10)∼1940. 조선 말기의 문신·친일파. 본관은 해평(海平). 영돈녕부사 철구(徹求)의 아들이며, 택영(澤榮)의 형으로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삼촌이다.

1894년(고종 31) 진사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비서감우비서랑(秘書監右秘書郎)이 되었다. 비서랑의 자격으로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의 일원이 되어 일본에 다녀오고, 1896년 내각총리대신비서관 겸 내각참서관·경연원시독관(經筵院侍讀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만장서사관(輓章書寫官)에 임명되었다.

1897년 중추원3등의관에 이어 바로 2등의관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농상공부협판참서관에 임명되었다. 1899년에는 내부지방국장, 1901년 경기관찰사에 임명되었고 궁내부특진관을 겸임하였다. 이해에 황해도관찰사로 전임하였고, 일본이 1898년 경부선철도부설권을 획득한 지 3년 뒤인 1902년 착공을 시작하자 철도원부총재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 지계아문부총재(地契衙門副總裁)에, 1904년에는 봉상사제조(奉尙司提調)·비서원경(秘書院卿)·시강원첨사(侍講院詹事)·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되고, 이듬해 의정부참찬·홍문관학사·평리원재판장·의정부찬정을 역임하였다. 1905년 교육사업에 관계하여 법학교를 설치한 바도 있다.

1908년 시종원경(侍從院卿)이 되고, 1910년 국권상실 때에 궁내부대신인 민병석(閔丙奭)과 함께 이완용(李完用)의 합방불가피 역설에 동의해줄 것을 요청받고 주저하다가 데라우치(寺內正毅)의 협박·회유에 동의하여 그 조인에 가장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국권상실 후 황실과 황족에 대한 대우와 친일분자에 대한 행상(行賞)을 실시하였을 때 일본정부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목요일, 10월 01, 2015

어떤 시선

딱히 이유를 설명하는건 어렵지만마네킹이나 캐릭터가 바라보는 시선엔 쓸쓸한 느낌이 담겨 있는거 같다. 묵묵히 퇴색해가는 모습엔 비장미가 진하게 배어가는거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