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10월 06, 2007

존재미학

예전에 읽었던 책을 책꽂이에서 한권 뽑았다. 재생지를 사용했기에 묵은 종이냄새가 알싸하게 다가왔다. 그중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일주일넘게 가방속에 있으면서 출퇴근때마다 몇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이책을 샀을때가 2001년도 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옥죄어 오던 주변의 상황과 힘에 무지하고 무력하게 밀려가고 있었고 출구를 찾아 무던히도 헤매고 있었다.
연필로 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내용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걸 보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내면의 준비가 덜되었던거 같다. 어쩌면 그때 운명의 힘이 그런 비루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줄 실마리를 던져주었던 건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지금의 내 삶에도 창조적인 힘을 발휘할 여지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 비루한 일상에서 출구를 찾고 나서는 용기와 행동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새롭게 읽게되는 기쁨이 있다니 좋은 책과 글을 읽는것의 즐거움이 이런것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사가게 되면 근사한 책꽂이를 가져야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거 같다.

주체는 권력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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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일방적인 강제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주체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움직인다. 다시 말해 푸코적 의미에서 권력이란 주체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주체를 무력화 시키는 힘이다. 거시권력은 바로 이 미시권력의 망을 토대로 비로소 작동을 하기에, 거시권력을 무너뜨리는 것만으로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푸코로 하여금 미시권력에 대한 분석에 착수하게 만든 동기였을 게다. 사실 군사독재가 물러간지 1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도 우리 사회 전체가 국방색을 띠고 있는 것은 거시권력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던 그 미시권력의 망이 얼마나 집요하고 완강한지 잘 보여준다.

사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이처럼 촘촘한 인간관계의 망으로 둘러 쌓여 있고, 이 속에서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 주체가 하는 말, 한 주체가 하는 행동, 아니 한 주체의 정체성 자체가 바로 이 '관계'라는 이름의 권력효과의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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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배려

프랑스어로 '주체'(=subject)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뜻과 아울러 그 정반대, 즉 '충실한 신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종종 간과되곤 하는데 푸코가 근대적 주체의 형성과정을 동시에 권력의 신민화 과정으로 파악하는 바탕에는 암암리에 이런 언어놀이가 깔려 있다. 초기의 푸코는 다분히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주체를 권력의 효과로, 주체의 발언을 담론의 효과로 파악했다. 말하자면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근대시민의 이상, 즉 '자율적 주체'란 한마디로 환상이라는 얘기다. 자율적 주체란 실은 외부의 감시의 눈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놓은 사람, 즉 타인의 감시가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 한마디로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주체'란 그야말로 권력의 망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벌레들과 다르지 않다. 그 벌레들은 머리로는 자기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사나 그의 행동만은 거미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유물론적인 권력 분석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망에 걸린 벌레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실은 죽음의 망에 걸린 구속된 존재(=타율적 대상)라는 쓰디쓴 진리를 깨닫고, 일체의 쓸데없는 저항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게다. 바로 이것이 9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푸코를 수용한 방식이었다. 이 경우 푸코는 앞서 내게 자기의 "인생공부"를 충고한 네티즌처럼 우리에게 일체의 저항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실천적 보수주의자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의 "왜소한" "인생"을 남에게 권고하는 것이 푸코가 권력분석을 한 동기는 분명히 아니었으리라.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에서부터 푸코는 문제의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권력의 망이라는 구조로부터 주체를 객관화하여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주체의 관점에 서서 권력의 망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방안을 찾는 방향으로 선회를 한 것이다. 즉 냉철한 권력분석의 과학에서 권력의 자기장 속의 인간이 자기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윤리학으로 문제의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 새로운 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권력의 망은 더 이상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고 결정하고 형성하는 힘이 아니라 동시에 나에 의해 변화될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내가 권력의 망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전략으로써 푸코가 제시하는 것이 '자기의 배려'라는 존재미학이다. 존재미학은 주체를 한갓 사물로 대상화하는 권력의 힘에 맞서 자기를 다시 주체로 형성할 미적인 윤리학이다. 다시 말해 권력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자기를 포기하지 말고 자기를 배려하고, 이로써 자기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실천적 테크닉의 체계가 필요하며, 이것이 이 사회의 새로운 미적 에토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권력이 강고하다 하더라도 그 권력의 망 속에서 미리부터 자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망가질 필요는 없다. 다른 삶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 앞에서 미리 망가지는 것이 삶의 지혜로 통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덕은 반공도덕이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윤리는 국민윤리다. 우리에게는 자기의 삶을 배려하는 개인윤리가 없었다. 파시스트적으로 구조화된 사회는 굳이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 속에서 자란 우리는 그것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 속에서 나를 잊으라고 요구하는 국민윤리나 반공도덕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료시민들과 평등하게 소통을 하는 테크닉으로서의 시민윤리이다. 이때 푸코가 말한 존재미학은 권력의 망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비루한 존재들에게 권력의 망 속에서 저항과 자기의 배려를 위한 실천적 테크닉을 언어적으로 분절화한 새로운 윤리, 성숙한 시민 사회를 위한 미적 에토스가 될 수 있다.

권력욕과 권력의지

니이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푸코에게도 '권력'이란 낱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선악의 기준을 대기 이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세상은 권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또 권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들 주의 어떤 것은 정당하며, 어떤 것은 부당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권력이고 대항권력도 역시 권력이므로 일체의 권력을 행사하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처녀성의 도덕은 니이체나 푸코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90년대의 푸코 수용은 다분히 저항권력 자체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뻔뻔한 보수적 논리로 귀결된 감이 있다. 푸코의 주장은 권력으로부터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거 권력의 노예가 되지 말고 그것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실천적 테크닉을 찾으라는 것이다.

니이체가 말한 '권력의지'는 흔히 말하는 '권력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권력의지'란 본디 한 인간이 가진 창조적인 힘(puissanc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력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을 해나가는 추진력일 수도 있고, 그 밖에 한 개인이 갖고 태어난 이론적, 실천적 능력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힘'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굳이 '권력욕'이라는 것을 가질 필요가 없다. 거기엔 아예 관심이 없다. 외려 무능한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을 확인받고 싶을 때 흔히 말하는 '권력욕'에 목을 매고, 남들에게 자신의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법이다. 그것이 자기가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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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자들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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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에는 거창한 대의가 있었고 위대한 영웅이 있었으며, 그들의 무용을 찬양하는 서사시가 있었다. 하지만 미시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은 우리처럼 비루한 존재들이 치러야 하는 재미없고 지루한 산문적 성격의 전투다. 거시권력에 대한 싸움의 주체가 화려한 중세의 기사라면 사회의 모든 곳에 깔려 있는 미시권력에 대한 싸움의 주체는 이름 없는 산업사회의 보병들이다. 흔히 푸코의 존재미학에 가해지는 비판 중의 하나는 '댄디라는 이름의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윤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사실 미시권력에 대항하는 미시정치학의 주체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이름 없는 보병들이다. 이들 역시 자기의 존재미학을 가질 자격이 있다. 자기의 몸을 촘촘히 감싸고 있는 권력의 망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 관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가운데 자기를 배려하는 실천적 테크닉. 이를 통해 제 존재를 완성으로 이끄는 실천의 미학은 무엇보다도 우리처럼 비루한 자들을 위한 미적 에토스다.

자기를 소외시키는 반공도덕이나 국민윤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배력하기 위한 시민적 에토스를 형성해야 한다. 진정한 엘리트는 그 잘난 1류 대학을 나와 기껏 자신을 포기하고 제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소위 '엘리트'들의 천민적 행태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사회의 모든 곳에서 자기 둘레릐 권력의 망, 즉 자기를 둘러싼 관계들을 변화시켜 사회를 항상 새롭고 젊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미시정치학을 통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제 삶을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들, 자기를 배려하는 존재미학을 가진 이 비루한 현대판 폴리스의 인간들이야말로 현대의 귀족이며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가 되는 길은 우리처럼 비루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아웃사이더_04 / 진중권, "존재미학, 비루한 자들의 미적 에토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