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었던 책을 책꽂이에서 한권 뽑았다. 재생지를 사용했기에 묵은 종이냄새가 알싸하게 다가왔다. 그중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일주일넘게 가방속에 있으면서 출퇴근때마다 몇번씩 반복해서 읽었다.
이책을 샀을때가 2001년도 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옥죄어 오던 주변의 상황과 힘에 무지하고 무력하게 밀려가고 있었고 출구를 찾아 무던히도 헤매고 있었다. 연필로 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던 흔적이 남아 있는데도 내용이 전혀 새롭게 다가오는걸 보면 이해하고 받아들이기에 내면의 준비가 덜되었던거 같다. 어쩌면 그때 운명의 힘이 그런 비루한 상황을 벗어나게 해줄 실마리를 던져주었던 건지도 모르는데.
하지만 지금의 내 삶에도 창조적인 힘을 발휘할 여지가 많음을 알게 되었다. 그 비루한 일상에서 출구를 찾고 나서는 용기와 행동은 지금은 물론이고 앞으로도 계속 유효할 것이다.
세월이 한참 지나서도 새롭게 읽게되는 기쁨이 있다니 좋은 책과 글을 읽는것의 즐거움이 이런것인 모양이다. 그리고 이사가게 되면 근사한 책꽂이를 가져야 되는 이유가 또 하나 생긴거 같다.
주체는 권력의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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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에 따르면 권력은 일방적인 강제만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주체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움직인다. 다시 말해 푸코적 의미에서 권력이란 주체의 자발적 동의를 얻어 주체를 무력화 시키는 힘이다. 거시권력은 바로 이 미시권력의 망을 토대로 비로소 작동을 하기에, 거시권력을 무너뜨리는 것만으로는 부당한 권력의 횡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이 푸코로 하여금 미시권력에 대한 분석에 착수하게 만든 동기였을 게다. 사실 군사독재가 물러간지 1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직도 우리 사회 전체가 국방색을 띠고 있는 것은 거시권력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었던 그 미시권력의 망이 얼마나 집요하고 완강한지 잘 보여준다.
사실 사회 속에서 개인은 이처럼 촘촘한 인간관계의 망으로 둘러 쌓여 있고, 이 속에서 주체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한 주체가 하는 말, 한 주체가 하는 행동, 아니 한 주체의 정체성 자체가 바로 이 '관계'라는 이름의 권력효과의 산물이다.
...
자기의 배려
프랑스어로 '주체'(=subject)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주인'이라는 뜻과 아울러 그 정반대, 즉 '충실한 신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종종 간과되곤 하는데 푸코가 근대적 주체의 형성과정을 동시에 권력의 신민화 과정으로 파악하는 바탕에는 암암리에 이런 언어놀이가 깔려 있다. 초기의 푸코는 다분히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주체를 권력의 효과로, 주체의 발언을 담론의 효과로 파악했다. 말하자면 근대철학에서 말하는 근대시민의 이상, 즉 '자율적 주체'란 한마디로 환상이라는 얘기다. 자율적 주체란 실은 외부의 감시의 눈을 자기의 내부로 옮겨놓은 사람, 즉 타인의 감시가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자신을 감시하는 사람, 한마디로 굳이 얘기하지 않아도 '알아서 기는' 사람이라는 얘기다.
이런 구조주의적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주체'란 그야말로 권력의 망이라는 거미줄에 걸린 가련한 벌레들과 다르지 않다. 그 벌레들은 머리로는 자기가 자유롭다는 착각 속에 사나 그의 행동만은 거미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가 없다. 이런 유물론적인 권력 분석의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망에 걸린 벌레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기가 자유로운 존재(=자율적 주체)가 아니라 실은 죽음의 망에 걸린 구속된 존재(=타율적 대상)라는 쓰디쓴 진리를 깨닫고, 일체의 쓸데없는 저항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을 게다. 바로 이것이 9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푸코를 수용한 방식이었다. 이 경우 푸코는 앞서 내게 자기의 "인생공부"를 충고한 네티즌처럼 우리에게 일체의 저항을 포기하라고 가르치는 실천적 보수주의자로 나타나게 된다. 하지만 이렇게 자기의 "왜소한" "인생"을 남에게 권고하는 것이 푸코가 권력분석을 한 동기는 분명히 아니었으리라.
<성의 역사> 제2권, <쾌락의 활용>에서부터 푸코는 문제의식의 전환을 보여준다. 과거에는 권력의 망이라는 구조로부터 주체를 객관화하여 바라보았다면, 이제는 주체의 관점에 서서 권력의 망을 변화시키는 실천적 방안을 찾는 방향으로 선회를 한 것이다. 즉 냉철한 권력분석의 과학에서 권력의 자기장 속의 인간이 자기를 주체적으로 형성하는 윤리학으로 문제의식을 변화시킨 것이다. 이 새로운 윤리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권력의 망은 더 이상 '나'라는 주체를 구성하고 결정하고 형성하는 힘이 아니라 동시에 나에 의해 변화될 수도 있는 어떤 것으로 등장하게 된다. 내가 권력의 망 속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 속에서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로 이 질문 앞에서 부당한 권력에 대항하는 전략으로써 푸코가 제시하는 것이 '자기의 배려'라는 존재미학이다. 존재미학은 주체를 한갓 사물로 대상화하는 권력의 힘에 맞서 자기를 다시 주체로 형성할 미적인 윤리학이다. 다시 말해 권력의 힘 앞에서 무력하게 자기를 포기하지 말고 자기를 배려하고, 이로써 자기의 삶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하는 실천적 테크닉의 체계가 필요하며, 이것이 이 사회의 새로운 미적 에토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권력이 강고하다 하더라도 그 권력의 망 속에서 미리부터 자기를 포기하고 스스로 망가질 필요는 없다. 다른 삶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권력 앞에서 미리 망가지는 것이 삶의 지혜로 통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가진 유일한 도덕은 반공도덕이고, 우리가 가진 유일한 윤리는 국민윤리다. 우리에게는 자기의 삶을 배려하는 개인윤리가 없었다. 파시스트적으로 구조화된 사회는 굳이 그런 걸 필요로 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 속에서 자란 우리는 그것을 배울 기회도 없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국가 속에서 나를 잊으라고 요구하는 국민윤리나 반공도덕이 아니라 시민 사회의 일원으로서 동료시민들과 평등하게 소통을 하는 테크닉으로서의 시민윤리이다. 이때 푸코가 말한 존재미학은 권력의 망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살아가야 했던 수많은 비루한 존재들에게 권력의 망 속에서 저항과 자기의 배려를 위한 실천적 테크닉을 언어적으로 분절화한 새로운 윤리, 성숙한 시민 사회를 위한 미적 에토스가 될 수 있다.
권력욕과 권력의지
니이체에게서와 마찬가지로 푸코에게도 '권력'이란 낱말은 부정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선악의 기준을 대기 이전에 존재하는 하나의 물리적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세상은 권력으로 가득 차 있으며, 또 권력이 없으면 이 세상은 돌아갈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을 가득 채우고 세상을 움직이는 권력들 주의 어떤 것은 정당하며, 어떤 것은 부당할 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이 권력이고 대항권력도 역시 권력이므로 일체의 권력을 행사하기를 포기해야 한다는 처녀성의 도덕은 니이체나 푸코의 생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90년대의 푸코 수용은 다분히 저항권력 자체의 정당성을 공격하는 뻔뻔한 보수적 논리로 귀결된 감이 있다. 푸코의 주장은 권력으로부터 도피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거 권력의 노예가 되지 말고 그것의 주인이 되어 그것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실천적 테크닉을 찾으라는 것이다.
니이체가 말한 '권력의지'는 흔히 말하는 '권력욕'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다. '권력의지'란 본디 한 인간이 가진 창조적인 힘(puissance)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창조력일 수도 있고, 어떤 일을 해나가는 추진력일 수도 있고, 그 밖에 한 개인이 갖고 태어난 이론적, 실천적 능력일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의 '힘'을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굳이 '권력욕'이라는 것을 가질 필요가 없다. 거기엔 아예 관심이 없다. 외려 무능한 사람들이 자신의 존엄을 확인받고 싶을 때 흔히 말하는 '권력욕'에 목을 매고, 남들에게 자신의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비로소 자신의 중요성을 확인하는 법이다. 그것이 자기가 중요하다고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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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루한 자들의 도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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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시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에는 거창한 대의가 있었고 위대한 영웅이 있었으며, 그들의 무용을 찬양하는 서사시가 있었다. 하지만 미시권력에 대항하는 싸움은 우리처럼 비루한 존재들이 치러야 하는 재미없고 지루한 산문적 성격의 전투다. 거시권력에 대한 싸움의 주체가 화려한 중세의 기사라면 사회의 모든 곳에 깔려 있는 미시권력에 대한 싸움의 주체는 이름 없는 산업사회의 보병들이다. 흔히 푸코의 존재미학에 가해지는 비판 중의 하나는 '댄디라는 이름의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윤리가 아니냐'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사실 미시권력에 대항하는 미시정치학의 주체는 소수의 엘리트가 아니라 다수의 이름 없는 보병들이다. 이들 역시 자기의 존재미학을 가질 자격이 있다. 자기의 몸을 촘촘히 감싸고 있는 권력의 망 속에서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그 관계의 성격을 변화시키는 가운데 자기를 배려하는 실천적 테크닉. 이를 통해 제 존재를 완성으로 이끄는 실천의 미학은 무엇보다도 우리처럼 비루한 자들을 위한 미적 에토스다.
자기를 소외시키는 반공도덕이나 국민윤리가 아니라 나 자신의 존재를 배력하기 위한 시민적 에토스를 형성해야 한다. 진정한 엘리트는 그 잘난 1류 대학을 나와 기껏 자신을 포기하고 제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소위 '엘리트'들의 천민적 행태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가정, 학교, 직장 등 사회의 모든 곳에서 자기 둘레릐 권력의 망, 즉 자기를 둘러싼 관계들을 변화시켜 사회를 항상 새롭고 젊게 만드는 사람들. 그런 미시정치학을 통해 자기를 포기하지 않고 제 삶을 예술작품으로 끌어올릴 줄 아는 사람들, 자기를 배려하는 존재미학을 가진 이 비루한 현대판 폴리스의 인간들이야말로 현대의 귀족이며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다. 그리고 진정한 의미의 엘리트가 되는 길은 우리처럼 비루한 모든 이에게 열려 있다.
아웃사이더_04 / 진중권, "존재미학, 비루한 자들의 미적 에토스" 중에서.
토요일, 10월 06, 2007
존재미학
토요일, 9월 29, 2007
야근에 대한 기억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회사( 지금은 없어졌다 )에서의 일이었다. IT SI업체였고 부사장격인 사람이 신입사원까지 관리하는 수준의 조직관리가 이뤄지고 있었다. 국문과를 졸업하고 취직을 위한 지렛대로 IT학원을 다녔었다. 수료 후 그 학원의 중개로 들어간 회사였다.
그 회사에서 신입사원을 관리하는 책임자는 없었다. 과,차장급 중간관리자는 한명도 없었다. 부사장격인 이사라는 사람이 말단직원까지 모두 체크를 하고 있었다. 회사에서 추진하는 일들도 그 이사의 머릿속에서 그려지는 스케줄과 사람에 대한 평가로 이뤄지고 있었다. 시스템과 체계라는걸 기대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이뤄지는 일들앞에서 유일하게 통하는 생존법칙은 알아서 배우는거였고 알아서 일을 찾아 나가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었고 유망한 사람이었다.
현실파악능력이 뛰어나지 못했던 나는 한참을 헤매야 했었다. 나는 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을까, 왜, 내가 하는 일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까 하는 라는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들을 가슴속에만 품고 지내야 했다. 내가 어디를 가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늠할 수 없었던 나는 일이 있으면 무작정 밤까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툭하면 주말에도 일하는 곳에 나와 있었다. 최소한 그렇게는 해야 된다고 여겼었다. 한번씩 있는 회식자리에서 야근과 일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누구나 그렇게 한다'라는 말을 어김없이 듣곤 했기에.
한참이 지난 후 그때의 일들이 회사의 횡포였고 무책임한 직원관리에서 비롯되었다는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때의 기억과 버릇들이 여전히 내게 남아서 영향을 미치고 있다. 퇴근시간이 지난 후 일어서는 것이 왠지 불안하고 어색하게 느껴진다.
공감이 가는 기사를 읽었다.
프레시안 기사 - '순진하면 사회생활 못 한다'는 사회가 정상인가
토요일, 9월 08, 2007
죽음과 함께 춤을
이책을 읽어야 겠다는 생각을 했던 계기는 목차에 들어있는 "천국에서 그가 본 것들"이라는 소제목 때문이었다. 죽음이 주는 허망함을 사후세계라는 것에서 그나마 위로를 받아 왔던 나는 현직의사의 입장에서 시후세계에 대한 이야기에 무척 관심이 끌렸다. 서점에 갔을때 내가 생각하던 책이 맞을까 확인을 하려 했는데 재고가 없었다. 좀처럼 이용하지 않는 인터넷을 통해 책을 샀다.
좀 실망을 했다( 내가 바라던 내용이 아니었음 ). 저자는 현직 의사의 자격을 가진이로써 철저히 과학의 입장에서 환자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썼다. 안락사 시킨 환자의 마지막 모습에서 신비한 느낌을 잠시 언급하기는 했으나 전체적으로 이 사람은 임사체험과 사후세계와 같은 비과학적인 영역은 처음부터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의사의 능력을 필요이상으로 높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오해와 편견을 재치있게 이해시켜 준다. 죽음을 앞둔 환자들의 삶에 대한 미련과 의사에게 의존하는 모습들을 익살스럽게 표현을 한다. 그런 환상을 심어준 의사들의 한계와 오만을 비판한다.
현대의 의학이 자리잡은 시점을 19세기말 정도로 볼때 눈부시게 발전한 부분은 "병리학, 세균학, 마취학" 이렇게 딱 세부분이라고 말한다. 그 이외의 눈부시게 발전해 보이는 부분들은 각종 편의장치들이 잔뜩 추가되었지만 본질적으로 변한게 없는 100년전의 자동차와 현대의 자동차의 차이를 비유해가며 이해시킨다.
잊을만 하면 심심치 않게 암을 치료할 수 있는 특별한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뉴스가 들린다. 심지어는 암치료 성공율이 50%정도라고 선전 하면서 발전된 의학의 성과를 광고 하지만 이런 뉴스들은 1950년대에 발표되었어도 비슷한 성공율도 발표되었을 것이라면서 과장된 현대 의학수준의 현실을 설명한다.
불치병에 걸린 환자에게 행해지는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환자 본인과 가족들에게 많은 고통을 주게 된다. 자연스럽게 안락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과연 가능하게 될지는 의문이다. 존엄한 죽음의 문제를 벗어나 치료비 부담의 문제로 안락사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숱하게 생기게 될지 모른다.
병원비의 문제가 아닌 존엄한 삶의 마감의 문제로써 안락사를 고민하고 시행할 수 있는 네델란드의 환경에서나 가능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동전의 양면처럼 삶과 한번도 떨어진적이 없으며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일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맞이하기도 힘든 문제이다. 그러기에는 현세에서 맺고 있는것들이 너무나 많다. 모든것들을 포기한다고 치더라도 아이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문제 앞에서 죽음을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래서... 내세라도 있으면 거기에서 다시 만난다는 위안이라도 가질 수 있으면..
금요일, 9월 07, 2007
지적 독립
상대의 권위를 너무 쉽게 인정하고 따라가려고 하던 때가 있었다. 벗어난거 같지는 않고 내가 그렇다는걸 느끼게 된지가 얼마 되지 않은거 같다. 가깝게는 주변의 사람들 부터 책을 통해 알게된 사람들의 면면까지 귀감이 될만한 사항들을 하나라도 알게 되는 순간부터 그사람은 멋있는 사람이고 좋은 사람이고 본받아야 할 사람이 되었다.
졸업 후 한참동안 창작과 비평을 계속 정기구독을 했던 이유도 거기에 나오는 내용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진실의 이야기들고 내가 당연히 따라가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동안 이보다 더 완벽한 생각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경외감까지 가졌던 어느 시사평론가의 경우도 마찬가지 경우였다. 그 사람과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음을 느끼게 되었을때 스스로를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대학다닐때 학생회의 주장들을 가슴한켠으로 드는 의구심들을 애써 묻고 자발적인 의식화(?)의 길을 걸어갔던 것과 같이.
"지적 독립"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좋은 글을 하나 읽었다. 최근들어 내게 일어나는 변화의 의미와 이유를 명쾌하게 이해시켜 주었다.
"...지적 도덕적 권위에 주눅들어 최소한의 합리적 의심마저 내던지고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런 식의 독서는 안 하느니만 못하다는 걸 깨달은 건 서른이 다 돼서였다. 어떤 공인된 전문가도, 어떤 공인된 대가(大家)도 틀릴 수 있다. 술에 취해 한 말이라 그럴 수도 있고, 격정이나 편견이나 이해관계에 휘둘려 쓴 글이라 그럴 수도 있고, 그가 본디부터 이름에 미치지 못하는 헐렁이여서 그럴 수도 있다. 그것을 잊지 않는 것이 지적 독립의 첫걸음이다...."
말의 힘 - 고종석
일요일, 9월 02, 2007
가을 문턱에 돋아난 새싹들.
조그만 텃밭을 일구고 있다. 지난주에 뿌렸던 무우씨와 배추 모종이 싹을 돋기 시작했다. 배추모종을 처음 받고서 심었을때 너무 연약해 보여 이중에서 몇개나 자리를 잡게 될까 걱정했었는데 오늘 보니 모두 자리를 잡아 파릇파릇하게 올라오고 있었다.뿌렸던 무우씨들은 그물망을 덮어두었었지만 비둘기등 날짐승들은 그물망을 헤짚고 주변의 씨았을 파먹었다. 그런 무우씨들도 이제 싹을 돋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텃밭 농사를 먼저 했던 사람들이 배추는 잘되지 않는다고 했다. 배추를 키우기 위해 화학 농약을 뿌리기 싫던 차에 유기농 농약이 있음을 알았고 한번 시도해 보기로 했다.
예쁘게 자리를 잡은 배추와 무우가 잘자라 기쁨을 수확할 수 있으면 좋겠다. 텃밭농사는 노동의 의미와 우주원리를 체득할 수 있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밭에 사마귀 한마리가 있었다. 둘째 윤성이가 호기심가득한 눈으로 보고 있다. 자연으로부터 너무 멀어져 버린 아이들에게 곤충들이 사람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존재들임을 느끼게 해줄 수 있는 교육의 기회도 된다.박각시 한마리가 주변밭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밤에 주로 활동하는 나방으로 알고 있었는데 이놈은 해가 없어서인지 연신 빨대처럼 길다란 대롱을 꽃에다 꽂고 있었다.
수요일, 8월 29, 2007
아프카니스탄 인질석방
어제 밤에 남아 있는 인질들 모두를 석방하기로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찌되었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번 일을 겪으면서 민족, 조국이니 하는 말들이 얼마나 공허한 개념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한민족, 단일민족, 대한민국을 외치던 나라의 국민들이 자기나라 사람들의 위태로운 목숨앞에서 어떻게 냉소를 보내고 외면할 수 있을까. 인질들이 선교를 목적으로 그곳에 갔음을 알려주는 내용의 글들을 번역까지 해서 탈레반의 홈페이지에 게재까지 한 사람이 있었다니 그런 잔인한 사람들과 같은 민족, 국민이라는 사실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건지 의아하기 까지 하다.
목요일, 8월 02, 2007
비슷한 취향
나는 왜 끈 달린 수첩에 껌뻑 죽는가
연필과 종이에 집착하는 나의 성향을 닮은 사람의 기사를 봤다. 사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지우개가 달린 연필과 메모하기 좋은 종이류들만 보면 한참 망설임을 겪어야 하는 기분이 어떤건지를 잘 알기 때문에 내내 공감을 할 수 있었다.
우연히 만났던 Dixon의 연필은 모두 세타스를 샀고 그중 한타스는 평생 소장의 의미로 포장을 뜯지 않은 상태로 두고 있다. Faber Castell의 GoldFaber는 개별로 손에 들어온거 까지 합하면 얼추 세타스 정도 되는거 같다. 또 연필을 손수 깍는걸 좋아하다보니 연필만큼은 아주 근사하게 깍아 놓을 수 있게 되었다.
하찮아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의미를 부여할 줄 아는것도 삶의 소소한 기쁨이지 않을까.
화요일, 7월 31, 2007
아프카니스탄 납치자 석방노력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람들부터 구해야 한다. 이런저런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내는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다. 더 바란다면 속이 타고 있을 인질 가족들의 처지를 조금이라도 이해를 해보라고 하고 싶다.
우리나라 정부에서 보낸 대통령특사와 아프카니스탄의 대통령이 무슨 긴밀한 협의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다지 영양가 있는 내용은 아니었을것으로 보인다. 아프카니스탄 대통령은 포로석방은 절대 없다고 하고 미국정부도 테러리스트와의 협상은 절대 없다는 영화속에서나자주 듣던 말을 반복하고 있다. 누구도 한국인질의 안위에는 별로 관심 없다는 말이다. 탈레반이 원하고 있는 포로의 석방문제가 빠진 그들의 원칙은 문제를 파멸로 이끌고 가겠다는 말로 밖에 들리지 않는다. 자국민이 테러범들에게 붙잡혀 있어도 저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상황에서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들이 참으로 허무해 보이기 짝이 없다. 조금만 생각을 해도 탈레반 포로석방의 열쇠를 쥐고 있는건 미국이라는걸 알 수 있다. 미국이 벌인 아프카니스탄 침략이었고 미국이 만들어준 현재의 아프카니스탄 정부가 아닌가. 탈레반과의 협상을 위해 사소한 문제도 민감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때에 오히려 탈레반 세력 소탕작전의 강도를 더해가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한국인 납치자의 죽음을 오히려 그들이 벌인 전쟁을 합리화의 좋은 도구로 사용하기 위한 사전 포석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게 한다.
이런 일련의 흐름을 볼 때 정부가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노력들이 문제의 과녘을 한참 비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통령 특사를 아프카니스탄으로 보낼게 아니라 부시대통령에게 보냈어야 했다. 원만한 해결을 위한 최소한의 조치로 탈레반에 대한 공세작전, 테러단체, 사악한 따위의 것들이나 테러범들에게 양보가 없다는 그들의 원칙을 잠시라도 중단해달라고 해야한다.
굳건한 한미동맹이라는게 겨우 이런것이었을까.
토요일, 7월 28, 2007
Sierra Zip Stove
눈여겨 보던 버너를 샀다. 이름이 Sierra Zip Stove여서 환경보호단체인 Sierra클럽과 관계가 있나 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Ultralight Backpacking에 대해 알무렵 눈에 띄었던 물건이었다. 한 3년쯤 지났나? 잊을만 하면 머릿속을 맴돌아 맘먹고 주문했다. 본사에 직접 주문했었으나 2주이상 기다릴 수 있냐고 묻길래 포기하고 다른곳을 찾았다. 언뜻 보기에 가장 문제가 될듯 싶은 모터를 같이 구입하려 했는데 마침 캐나다에 있는 쇼핑몰에서 부품을 같이 파는 곳이있었다.
AA사이즈 배터리 하나로 10시간정도 팬을 돌릴 수 있다니 이로써 캠핑에서 연료걱정은 끝난셈이다.( 물론 간단히 조리할 정도의 개스버너는 보조로 가지고 있는게 좋다. )
생각보다 튼튼하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모터도 외부에 노출되어 있고 배터리 넣는 부분도 방수기능은 고려되지 않아 내구성에는 썩 신뢰가 가지 않는다.
성능은 기대한만큼 나왔다. 정확한 화력을 잰다는게 애당초 힘든 물건이다. 화력은 넣는 나무조각과 양에 따라 결정된다. 나무조각이 들어가는 부분에 차곡차곡 넣지 않는 이상 불이 계속 붙을 수 있도록 연료를 보충해 줘야 한다.
비오는 날에는 어떻게 사용하나 걱정을 했었다. 마침 처음사용했던 때가 장마철이고 전날 많은 비가 내린 후여서 구할 수 있는 나무조각들은 죄다 젖어 있었다. 처음 불씨만 살려 주니 젖은 나무들도 문제없이 타기시작했다. 날씨 영향은 거의 받지 않는 셈이다.
산이 많다고는 하지만 오지라고 부를 수 있을만큼 사람사는곳과 떨어진 곳이 별로 없는 우리나라의 등산문화에서는 좀처럼 소용이 없을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직까지 수입이 되지 않은지도 모른다. 산속으로 들어가면 몇일씩 문명과는 떨어져 있어야 하는 북미쪽의 등산 문화에 꼭 맞는 제품인거 같다.
목요일, 6월 07, 2007
불가항력적인 일들
감당할 수 없는 일들을 겪을때가 있다. 개인의 역량을 훨씬 넘어서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결과를 지켜보고만 있어야 할때 어떻게 하면 이런 무기력한 순간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는 방법일까. 그 일을 겪은 이후, 삶이 바뀔정도의 일이라면 어떻게 받아 들이는게 현명한 일일까. 곧바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야박한 교과서적인 답안들은 이미 머릿속에 있거나 어디에나 널려있다. 그런때 필요한건 속깊은 이해와 동감이 아닐까.
확실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주변인으로 맴돌던때가 있었다. 한심한 현실을 깨닫지 못하고 제자리 뜀박질 마냥 현실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면서 그렇게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을때가 있었다. 물론 세상살이는 오롯이 제가 책임지고 헤쳐 나가야 한다고 다짐 정도는 몇번씩 했었다. 하지만 직장생활에 첫발을 막 내디뎠을때의 나는 그런 현실을 깨닫고 헤쳐나가기엔 너무나 어리숙하고 여리기만 했었다.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야박함을 느낄 정도로 아무런 귀띔을 해주지 않았던 이들에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 일거다.
그렇게 돌아갔던 내 세상이었지만 그런와중에서도 위로와 이해를 주었던 것들도 있었다.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시력을 잃어가는 미쉘을 치료하기 위해 붙인 벽보를 알렉스가 불태우는 장면이 있었다. 미쉘을 뺐기고 싶지 않은 알렉스의 절박한 마음에서 알수없는 뭉쿨한 마음을 느꼈다. 그리고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이끌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