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텔이 PC통신 서비스 사업을 완전히 종료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큰 즐거움을 느끼던 곳이었고 결혼까지 하게된 매체가 사라진다는 소식을 들으니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각별한 추억이 서린장소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소식을 듣게된 기분에 비유할 수 있을까.
학생시절 부모님을 어렵게 설득해(?) PC를 장만 했었다. 그리고 얼마 후 모뎀을 장착했다. 전화선을 연결한 다음 파란색 화면에 '삐이이익~~추앙캉퐝카~~’하는 신호음을 내면서 2400bps로 연결되었다는 메세지와 함께 한줄씩 열리는 세계는 경이로움 자체였다.
인문학 계열 학문을 전공했기에 당시에는 주변에서 PC통신을 직접하는 이들이 흔하지 않았다. 같이 자취생활을 하던 친구도 문외한이기는 마찬가지여서 오직 풍문으로 들은 전화비에만 관심을 가졌다. 모든 생활비를 나눠서 분담했던 그때 천리안은 별도로 청구서가 날아오니 걱정말라는 나의 말에 곧 안심을 했다. 지금 이자리를 빌어 그때의 룸메이트에게 사과를 해야 겠다. 천리안 이용료만 별도의 청구서에 기재가 되었고 전화비는 물론 별도로 청구가 되지 않았다.
사회생활을 서울에서 시작하고 1년쯤 지났을 때였다. 스산한 시간이 이어지고 있을때 천리안의 한백오름회라는 동호회를 알게 되었었다. 97년 6월 연휴가 이어질때 산악회의 의근이형, 진기형과 함께 설악산의 용아장성능을 갔었다. 산행중에 남자 세명과 여자 한명으로 이뤄진 산행팀과 마주쳤었다. 여자의 배낭에 달려 있던 명찰에서 그들이 한백오름회라는 PC통신 천리안 모임의 회원들이라는걸 알게 되었고 산행 후 호기심에 그 모임을 찾았다. 역시 용아장성능을 산행한 이야기가 올라와 있었다. 게시판의 글을 읽고 쓰는게 지금은 아주 일상화된 일이지만 그때는 내 이야기가 그곳에 있다는거 자체로도 신기한 일로 여겨졌었다. 그들이 반고, 사사, 케이투라는 대화명을 사용하는 회원들이라는것도 알게 되었고 호기심에 몇번의 메세지들을 주고 받은 다음 나도 가입을 했다.
처음 참석했던 모임이 대전 대둔산에서 열렸던 8/15일의 월정기산행이었다. 수십명의 처음보는 사람들과의 만남은 스산하기만 하던 시간을 보내고 있던 나에게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던 서울에서의 번개, 정모, 띠모임등의 자리에 갈때마다 느꼈던 벅찬 설레임은 참 대단한 것이었다.
접속하기 참으로 불편했던 인터넷이 점점 쉬워지고 보편화 되면서 PC통신은 사양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그때의 모임은 천리안을 떠나 프리챌로 옮겼다가 지금은 네이버에서 계속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기술의 발달이 사람에게 행복까지 같이 주는건 아닌거 같다. 처음으로 가졌던 PC의 사양이 지금 손바닥에 들어오는 PDA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사양이었다. 메모리는 8MB였고 하드디스크는 340M짜리였다. 그것도 200MB면 충분하지 않겠냐고 생각을 했었다. 지금의 메모리스틱의 용량에도 미치지 못한 것이다.
컴퓨터의 성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삶의 모습을 본질적으로 바꾼건 없다. 추억거리로 남아있는 PC통신에서의 의사소통의 기능이 지금이라고 별로 나아진건 없어 보인다. 정보의 양과질은 오히려 그때가 낳았던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이용하는 사람은 역시 아날로그적인 감수성을 가지고 살 수 밖에 없다. 없어져 가는 파란색 바탕의 PC통신에 대한 아련하고 가슴슬레었던 추억은 영원할 거 같다.
수요일, 1월 31, 2007
PC통신 하이텔 서비스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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