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4월 30, 2008

정답없는 세상

다음은 프랑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의 일부라고 한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행복이 가능한가?
과거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사랑이 의무일 수 있는가?
죽음은 인간에게서 일체의 존재 의미를 박탈해 가는가?
역사가는 객관적일 수 있는가?

철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예술이 인간과 현실과의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가?
무의식에 대한 과학은 가능한가?
현실이 수학적 법칙에 따른다고 할 수 있는가?
권리를 수호하는 것은 이익을 옹호하는 것과 같은 뜻인가?
정의의 요구와 자유의 요구는 구별될 수 있는가?

다름은 곳 불평등을 의미하는 것인가?
평화와 불의는 함께 갈 수 있는가?
일시적이고 순간적인 것에도 가치가 존재하는가?
종교적 믿음을 가지는 것은 이성을 포기한다는 뜻인가?
진리가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할 때 진리 대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환상을 좇아도 좋은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2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위질문의 절반도 생각해보지 못했던거 같다. 질문들의 요지는 세상살이에는 딱히 정답이 없고 끝없는 성찰이 필요하다는걸 사회의 문턱으로 나서는 이들에게 각인 시켜주는 목적도 있었을거 같다. 수많은 현자들의 말씀들 통해 '이거다' 하는 말들을 들을 수 있지만 현실의 삶에 대입시키는 과정중에 희석되어 없어져 버리거나 곧 약발을 잃게 되고 만다.

세상일에 정답이 없다는걸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도 30대를 훨씬 넘어서였다. 그 전까지는 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라고는 없었다. 오로지 세상의 정답을 향해 저돌적으로 나가고 있었다. 개인적인 두뇌회전력의 부족에 제일 큰탓이 있겠지만 고등학교 까지 이뤄지던 공교육에도 책임이 일부분 있을 것이라고 본다. 프랑스 학생들이 위와 같은 삶의 본질에 닿는 질문들을 받으며 사회로 나서고 있을 무렵 나는 '대학에만 가면 된다. 그때부터 시작해도 늦지 않다'는 말들을 들으면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서울대에 몇명이 들어갔는지가 중요하던 그곳에서 자신이 어떤 사람이며 재능은 뭐고 스스로 무엇을 원하는지 곰곰이 사유하고 각성할 기회 라는게 애당초 없는 곳이었다. 공교육은 그런거 하라고 존재하는게 아닐까? 하여튼 그렇게 서른 넘어서도 자신이 누군지, 원하는 게 뭔지 모르는 사람이었고 사지선다형 답안에서 답을 찍어낼 궁리를 하며 헤메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진정한 가치는 상상속의 것이든 진짜이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는지 여부로 결정 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도달하기 위한 진지한 노력에 의해 결정된다. 진리의 소유 여부가 아니라,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다 보면 능력이 점점 커지고, 계속해서 더 완벽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생기게 된다. 소유는 사람을 수동적이고 게으르게, 오만하게 만든다. 만약 하느님이 오른손에는 모든 진리를, 왼손에는 비록 끊임없는 실수를 저지르더라도 꾸준히 부지런하게 진리를 추구하려는 열정을 감춰 쥐고서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겸손하게 왼손을 택할 것이다.
고트홀트 레싱Gothhold Lessing, <<안티 괴제Anti-Goeze>>(1778)

끊임없이 솟아오르는 불확실한 미래에서 오는 불안감을 눌러가며 묵묵히 살아 가야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 그렇게도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일까. 삶의 정반합의 변증법적 과정일 것이다. 삶에 정답이 있다면 세상은 또 얼마나 삭막하고 각박 해졌을까? 그래서 이 뒤떨어지는 지력을 소유한 이도 불확실한 세상뒤로 숨어들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칼럼] 인간과 세상에 대한 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