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9월 22, 2009

영원한.. (?)

한때 그런게 있을거라는 믿음을 가졌을 때가 있었다. '영원한 관계'라는거. 특히 '가족'같은 관계라는말이 의미하는 사회관계적인 한계를 뛰어 넘는 그런 관계가 있을거라는 믿음 같은것. 그러나 영원할거 같았던 관계들이 어이없는 이유들로 끝나는 경우가 있다. 무너지는 것은 금방이듯이 10년이상 이어진 관계가 무너지는데는 불과 몇달도 길었다.

시작은 사소한 문제들이 발단이었다. 서로간에 냉랭한 기운의 조짐은 익히 알고 있었으나 설마 '가족'같은 우리에게 그런 문제가 대수일까 싶었다. 그러나 뉴턴의 만유인력법칙이 전 우주를 관통하는 기본적인 법칙이듯이 결국 그 모임도 인간관계의 기본을 이루는 보편적인 원리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 없는 똑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었다. '가족'이라는 말도 그와 같은 기본적인 법칙을 벗어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깨지는 관계들이 그렇듯이 문제는 벌어지고 있는데 아무도 신경써는 사람들이 없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악화 시켜갔던거 같다. '가족'이라 이야기 하던 구성원이 모임을 떠나는 상황인데 이렇게도 무관심할 수 있나 하는 배신감(?)은 그런 감정에 휘발유를 들이 붙었다. 구성원에대한 '관심과 배려'가 사라진 모임은 더 이상 그 개인에게 아무런 의미를 지닐 수 없는게 아닐까. 지금도 여전히 남은 이들끼리 '가족'이라는 호칭으로 서로를 부르고 있다. 결국 나는 그 '가족'도 아니었고 '식구'도 아니었던걸 혼자서 그렇게 여겼던 건지도 모른다.

'자일의 정'으로 맺어진 관계는 특별한게 있는줄 알았었다. 결국 똑 같은 사람들이었다. 더 잘난것도 못난것도 없는 그런 사람들.

목요일, 9월 17, 2009

우주


허블 울트라 딥 필드(The Hubble Ultra Deep Field; HUDF)로 알려진 허블 인공위성 망원경이 찍은 사진으로 지구에서 50억에서 80억 광년 떨어진 곳에 원시 은하들이 모여있는 모습의 사진이다. 우리가 보는 하늘 전체에서 손톱보다도 작은 공간에서 이정도의 은하계들이 있다. 1970년대 까지 북두칠성의 국자 부분정도의 크기에 담겨 있는 은하계의 숫자는 약 400개 정도가 있는것으로 관측되었으나 허블 인공위성 망원경의 관측 이후로 그 부분에만 1억 9천만개 이상의 은하들이 있는 걸로 밝혀졌다. 하늘에 점하나 찍으면 그 속에 수백개의 은하계가 있다는 말이된다.

저 속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과 문명이 발생해 발전하고 사라져 갔을까. 우주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제 각각의 특성과 성질을 유지하기 위해 나름의 원칙이 있듯이 인간이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숙명같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과 직관을 넘어서는 크기의 우주앞에서 모든것이 하찮고 덧없어 보여 소소한 고민들은 정화되는거 같다.

1대 3억의 비율로 줄이면 지구는 지름 4센티미터의 공, 즉 골프공이 된다. 이 축적에서 지구가 여러분 앞에 있다면, 달은 팔 길이만큼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며 크기는 완두콩보다 약간 클 것이다. 화성은 둥글레 만든 풍선껌 크기일 것이며, 지구에 가장 가까이 올 때 240미터 떨어진 곳에 있을 것이다. 목성은 2.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비치볼일 것이며, 태양은 46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지름 4.3미터의 불타는 공일 것이다. 태양계 전체의 지름은 19킬로미터이다. 작은 도시와 비슷한 크기인 것이다. 우주가 얼마나 공허한지 눈여겨보라. 이 작은 도시에는 중심에 버스 크기의 별이 하나 있고, 9개의 행성들( 가장 큰 행성이 비치볼 크기이다 )과 먼지 조각보다 작은 소행성들과 별똥별들이 있을 뿐, 그 이상 아무것도 없다. 1대 3억의 축적에서 가장 가까운 별들은 3만 2,00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다. 다시 말해서 만일 각각의 태양계가 "도시"라면, 우주는 지구의 표면 전체에 도시가 딱 하나일 정도로 비어 있다. "우주 생명 오디세이"에서 발췌

가까운 행성까지만 해도 도저히 다다를 수 없을거 같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넓은 우주. 행성 지구가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든다. 우주에서 올지도 모르는 외계문명의 신호를 잡기위한 노력들이나 보이저호에 실어 보낸 지구인의 메세지들도 그런 지구인들의 외로움이 그대로 묻어 나는 노력들이 아닐런지. 'UFO'나 '외계인'의 이야기들을 무시할 수 만은 없을것이다. 그러나 우주의 넓이를 넘어선다는게 '외계인'들에게 조차도 얼마나 어려운일인지를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런 이야기들에 회의감이 든다. 어쩌면 그런 이야기들도 외로운 행성 지구를 위로하는 한 방법인지도 모르겠다.

수요일, 9월 16, 2009

칭다오 맥주


칭다오에 갔을 때였다. 저녁 밥상에 올라온 칭다오가 눈에 들어왔다. 맥주병을 보고서 참 맛있게 생겼다고 느꼈던건 처음이었다. 칭다오 맥주맛이야 세계적인 것이지만 맥주병에서까지 이런 느낌을 확인하게 될줄이야. 칭다오의 재래 시장에 갔을때 어느 노점상인이 이 맥주병을 들고 마시는 모습을 봤을때도 그랬다. 저렇게 맛있는 맥주를 쉽게 마실 수도 있구나 하면서 부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 대형마트에 갔을때 칭다오 맥주가 있길래 몇병 얼른 집어 들었다.

가을


가을이 왔다. 일거리 하나 마치고 보면 계절이 두어개는 후딱 지나버린다. 나이를 먹을 수록 시간이 빨리 간다더니 빈말은 아니었던거 같다. 방태산에서 '살며시' 고개를 내미는 가을을 담았다. 야영이 대중문화의 한코드가 되면서 여름철에는 어디 텐트 펼칠만한곳 찾는것도 힘들어져 버렸는데 여름끝무렵때문 인지 야영장은 텅비어 있었다. 그렇게 깊은 계곡과 숲속에서 지나가는 여름을 만끽하는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화요일, 9월 15, 2009

아옌데 대통령


살바도르 아옌데 대통령의 대한 기사를 읽었다. 그 기사를 본 후 아옌데 대통령의 동상이 있는 모네다궁 앞에 가서 꽃한송이 바치고 싶어졌다. 기념사진 찍는걸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그의 동상앞에 서서 사진 한장 찍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꿈꾸던 좌파정권은 자리를 채 잡기도 전에 좌절되고 말았다. 세상은 레드컴플렉스에 휩쌓여 있었고 자기 발밑에 좌파정권이 들어서는걸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은 칠레가 가진 자원들의 가치를 무력화 시키며 옥죄어 나간다. 그리고 군부를 자극해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결국 그들의 꿈을 짓밟아 버렸다.

짤막한 기사를 통해 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감동을 받았던건 저열한 인간들의 탐욕을 넘어서는 인간의 숭고한 가치를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탐욕과 절망으로 점철되어 더이상의 희망이 존재하지 않을거 같지만 더 나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숭고한 영혼들도 있다. 자진해서 유태인들을 나치에게 넘겼던 이들이 있었던 반면에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그들을 보호해준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대통령이 사는 모네다궁을 탱크와 비행기로 포위한 군부는 대통령의 국외 탈출을 권유했으나 아옌데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리고 죽음으로 맞서며 라디오 방송을 통해 칠레 국민에게 한 최후 연설 내용. 아옌데 대통령이 꿈꾸던 신생 좌파정권은 실패했으나 그 꿈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계속해서 영역을 확대해갈 것이다.

“역사적 순간에 서서 저는 민중의 충성에 대한 빚을 갚기 위해 제 목숨을 바치려 합니다. 그들은 무력을 갖고 있으므로 우리를 노예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의 전진은 범죄로도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역사는 우리의 것이고, 민중에 의해 만들어집니다. 머지않아 위대한 길이 다시 열리고 이 길로 자유인들이 더 나은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걸어갈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칠레 만세! 민중 만세! 노동자 만세! 이것이 저의 마지막 말입니다….”

☞ 기사원문
☞ 관련내용
☞ 아옌데 대통령 추모 싸이트

금요일, 9월 11, 2009

특전 U보트( Das Boot )


이 영화를 처음 봤던게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없는 용돈을 억지로 만들어 친구와 같이 영화관을 찾았다. 순전히 프라모델로 만들었던 U보트가 나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러 갔던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당시 TV시리즈로 인기를 끌었던 '전투'나 2차 대전영화와 같이 단순히 적군과 아군이 싸우는 단순한 구조의 내용이 아니어서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더구나 U보트가 연합군의 구축함에 속절없이 당하다가 결국 침몰하고 마는 모습을 보고서는 영화전 신났던 마음마저 침울하게 변해서 극장을 나서야 했었다. 얼마전 EBS에서 이 영화를 방송하는걸 다시 봤다. 그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장면들의 이해를 통해 심란한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섰던 마음을 이해 하게 되었다. 입구에서 괜히 초등학생들을 막아섰던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장면이 있다. U보트가 연합군측 상선 세척을 향해 연달아 어뢰를 명중 시킨다. 곧 반격에 나선 연합군의 구축을 피해 잠수를 한다. 6시간 동안 연합군 구축함의 추격을 무사히 피한 U보트는 그들이 공격한 상선의 피해사항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부상한다. 그러나 세척중 한척이 여전히 불이 붙은채 그곳에 있었다. 침몰할거 같지 않은 그 유조선을 향해 다시 어뢰를 발사한다. 배위에서 그때까지 구조를 기다리고 있던 선원들이 바다에 뛰어 들며 그들을 격침시킨 U보트를 향해 살려달라며 헤엄쳐 오기 시작하지만 함장은 더이상의 인원을 수용할 여력이 없다며 구조를 하지 않는다. U보트는 아군과 적군 모두에게 버림받은 선원들을 애써 외면하며 무거운 분위기속에서 그곳을 벗어난다.

그 장면에서 또 다른 전쟁영화 씬 레드 라인"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일본군이 점령하고 있는 곳을 향해 가던 미군들 앞으로 원주민 한명이 아무런 상관도 관심도 없는듯한 모습으로 터벅터벅 지나가던 그 장면. 전쟁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성스러운 것이라 정치가들은 선동하지만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에서 개별 구성원들은 전쟁의 부속물에 불과하다. 누가 점령군이던 상관없는 원주민이 미군앞을 무심히 지나가는 모습처럼 전투 당사자들의 문제가 아닌 나머지 '전쟁 부속물'들의 사정따위는 애당초 관심밖의 일이다. 연합군측의 상선이 침몰을 보면서도 구조를 하지 않았던 구축함들의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

그때까지 봐오던 2차대전 영화속의 독일군은 연합군 앞에서 추풍낙엽같은 존재이거나 감정이입의 여지가 없는 모습으로 그려졌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특별히 '어느편'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독일군이던 아니던( 연합군이라 해도 어색하지 않았을 것이다 ) 잠수함이라는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전쟁 수행의 모습을 통해 전쟁과 개인의 의미를 짚어 보게하는 수작으로 평가하고 싶다.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보이는 즐거움, 나이 먹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것도.

금요일, 9월 04, 2009

쓸쓸함

어느 길목에서 잡귀를 막으며 서있었을 돌장승이 어떤 사연을 겪으며 삼청동 골목에 오게 되었을까. 소품으로서의 장승이 쓸쓸한 느낌을 주었다. 우리 속에 갇혀 무기력하게 주는 먹이를 먹고 있는 맹수들의 모습을 보는 느낌이랄까.





수요일, 9월 02, 2009

늑대 '아리' 사살

얼마전 우리를 탈출했던 늑대 '아리'가 사살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 관련기사 ). 총에 맞아 죽은 '아라'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평생 우리속에만 있는 동물이 비단 늑대뿐은 아니지만 야생의 습성이 살아 있는 늑대에게는 얼마나 더 큰 고통이었을까. 탈출후의 짧은 외출의 마지막 자유를 제대로 누렸기를 빌었다. 야생의 습성을 가진 굶주린 늑대가 일으킬지 모르는 상황들에 대한 부담감에서 사살을 결정한 담당자들의 심정도 이해한다. 평생 우리속에 살던 늑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의문은 들지만 아마 내가 그자리에 있어으면 같은 결정을 내렸을거 같다.

90년대 말이었다. 경북 구미에서 잠시 동안 일을 할때 였다. 근처 관공서 알림판에 붙어 있었던 늑대를 목견한 이를 찾는 다는 포스터 한장을 보고 감동했던 기억이 있다. 야생동물이라고는 산토끼 정도 밖에 살지 못할 정도로 구석구석이 개발된 우리나라에서 아직도 야생 늑대를 기대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속에 가둬 키우던 늑대 한마리를 받아들이지 못할 정도로 우리나라의 자연은 본질을 잃어 버렸구나 하는 씁쓸함이 든다.

뉴스에서 멸종한 동물들을 복원한다는 소식을 간간이 듣게 된다. 그러나 복원한 동물이 살아갈 자연이 없는 상태에서의 복원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지구에서 원래는 그들도 함께 살아가는 존재 들이었음을 수용하고 그런 모습들이 당연한일로 받아들이게 되는 일은 불가능한 공상일까. 풍경좋은 경관의 기능으로써의 자연이 아닌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그런 숲을 가진 곳.



96년 늦봄이었다. 그때 산악회에서 같이 활동하는이와 북한산위쪽으로 한북정맥으로 이어진 호명산에 있던 폐군부대 건물에서 하룻밤을 묵었었다. 늑대 특유의 울음 소리를 듣고서 잠을 깼었다. 내 귀를 의심했었다. 같이 있었던 이도 역시 의아해 했다. 그때 그 소리는 뭐였을까. 집나간 개가 외쳤던 소리일까. 아니면 진짜 늑대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