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10월 16, 2007

실망

좋아하던 지식인이 있었다. 그중 몇명은 실망감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그들의 북한에 대한 입장을 확인하고 나서였다. 현실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손한 태도를 거침없이 비판하던 이가 대상이 북한이 되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돌변하는 점을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이의 도움으로 북한을 방문할 수 있었다고 했다. 출입국 심사를 받는 자리에서 앞에선 이가 북한의 관리로 부터 호된(?) 질책을 받는 장면을 목격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집을 두채를 가지고 있었고 세금 절감의 목적으로 부부이면서 호적을 별도로 가지고 있은 모양이었다. 그 북한 관리는 이 부분을 문제 삼아 '아주 돈이 많은 모양이구만요' 라는 말을 하면서 여권을 팽개쳤다고 한다. 그 장면을 본 그 평론가는 북한관리의 불손한 태도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단지 돈이 많은 것이 불편한 세상에서 겪어야 할 당연한 일로서만 언급하고 있었다. 그러고서는 고난의 행군을 겪어나온 북한인들의 단결성을 칭찬하는 이야기로 이어졌었다. 평소에 보여주던 그의 모습에 비춰보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북한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말로써 끝을 흐렸다.

이번 남북정상회담때 도올 김용옥씨도 같이 방문했었다. 5만명이 동원된다는 아리랑 공연에 대한 감상을 쓴 기사를 읽었다. 세계에서도 유례가 없을정도로 웅장한 스케일로 벌어지는 공연앞에서 온전한 판단력을 유지하는건 쉽지 않은 일일거 같다. 하지만 감상과 이성적인 판단은 구분할 수 있는 지식인으로 생각했고 그런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감상은 어떤것일지 궁금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기대 이하의 반응을 보고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플라톤의 국가론까지 들먹이며 북한체제를 찬양을 하는데 대해서는 실소를 머금어야 했다. 학교 단위의 운동회를 위해서도 교사들의 폭행을 당하면서 준비를 한 기억들이 드문건 아닐 것이다. 5만명이 동원되어 벌어지는 행사가 체제를 찬양하게까지 하는 의미를 가진데 대해서 이해 할 수 없다.

홍수에 떠내려 가는 다섯살짜리 딸을 구하는것 대신 김정일의 초상을 먼저 구해낸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나라가 그렇게 대단한 집단일 수 있을까. 그런 체제를 선전하는 행사가 그렇게 대단한 것일까.

플라톤은 '이상국가'를 말한다। 그가 사용한 단어는 '폴리테이아'인데, 그것은 스파르타를 모델 중의 하나로 삼은, 최고선(The Supreme Good)을 구현하기 위하여 엄격히 통제된 정체(政體)를 말한다. 인간의 출생부터 우생학적 고려를 거쳐 집체적으로 교육되는데,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는 사실은 사유재산의 부정을 위해 가족까지도 파괴된다는 것이다. 이상국가에는 '엄마' '아버지'라는 말이 존재하지 않는다. 사실 북한 사회는 플라톤의 이상국가에 비하면 훨씬 더 인간적이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은 영국의 토머스 모어(Thomas More, 1477~1535)가 처음 쓴 말인데 그것은 우(ou)라는 부정사와 토포스(topos)가 합쳐진 희랍어로서 "아무 데도 없는 곳"이라는 뜻이다.

북한은 사실 이 지구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기 어려운 정체를 가진 나라임에 틀림없다. 아리랑에 출연하는 5만여 명의 동작이 변검(變)의 탈처럼 순식간에 변하여 일초일촌의 오차도 있을 수 없다. 거대한 경기장을 안방 파리처럼 날아다니는 교예사들의 아슬아슬 곡예는 간담을 서늘케 하지만 그 절제 있는 동작의 미학은 찬탄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쇼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 유토피아의 삶이며 역사며 가치이며 희망이다. 이러한 집체적 훈련에 참여함으로써 그들은 교육을 받고 의식화된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에서도 가장 중요한 교과목은 용맹스러운 음악과 집체적인 체조였다.

"보지 않으면 몰라. 좌우지간 보고 말해야겠구먼." 민노당 천영세 의원의 소감이다. 해석은 자유다. 남한 사람들의 해석을 북한 사람들이 강요할 수는 없다. 단지 우선 보아야 하고, 우선 정확히 그 실상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기대 이상의 성과가 나왔다. 성과의 조목도 매우 구체적이다. 전일한 목적을 위해 집체적으로 통합된 사회! 과연 그 최고선의 목적이란 무엇일까? 그것이 불변의 고정적 목적일 수는 없다. 변증법적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이제 우리의 기대는 이러하다. 집체적으로 통합된 에너지를 과연 그들은 '경제강국'이라는 목표를 위해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단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그들은 물질적으로 잘살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우리를 안내한 조평통의 여성 동지가 말한다 : "잘사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올바르게 사는 것이 목표입네다."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탐욕이 배제된 지성(nous)이 실현되는 나라였다. <도올 김용옥 기자: http://news.joins.com/>